떨리는 손이 건넨 반지, 배타적 소유의 연대기
또 하나의 기억.
이는 그의 충동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두 번째 이야기다. 아마 첫 번째, 서점에서 우연히 만났다 헤어진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그녀와 헤어진 후, 두세 번의 만남과 이별을 거쳐 선배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렇게 두세 달쯤 지났을 무렵, 둘은 제주도 여행 중이었다.
그는 아내에게는 평범한 주말여행이라고만 말해두었지만, 사실 주머니 속에는 반지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가 청혼을 망설이며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할 거라는 염려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 그는 프러포즈 장소를 두고 깊이 고민했다. 야경이 멋진 타워 레스토랑에서 사랑의 자물쇠와 함께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끽할까, 도심 스카이라운지에서 환상적인 야경을 배경으로 식사를 할까, 한강 위 요트에서 노을을 보며 프라이빗하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까. 아니면 유서 깊은 레스토랑에서 촛불과 함께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할까.
하지만 그는 결국 상대방을 향한 진심이 가장 중요하다고 결론 내렸고, 그 진심을 담아낼 장소로 제주도를 택했다.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하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곳에서 깜짝 프러포즈를 할 계획이었다. 특히 노을이 아름다운 해안도로는 로맨틱한 분위기를 더해줄 거라 생각했다. 혹은 제주의 울창한 숲 속에서 자연의 품에 안겨 조용하고 아늑하게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다.
그들은 여행 가방을 객실에 두고 2층 테라스에서 잔을 비웠다. 이어서 아래층 테라스로 연결된 돌계단을 내려간 뒤, 투명한 호텔 유리문을 지나 하얀 접이의자가 줄지어 놓인 잔디를 지났다. 그리고 해변가에 다다른 그들은 맨발로 거닐었다. 가을이 늦장을 부려 약간은 더운 오후였다. 너르디너르게 펼쳐진 하늘은 하얀 구름이 간혹 태양을 가렸고, 그러다 다시 태양이 비추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빛났다. 파도는 잘싸닥거리고 바람결에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녀의 한 손은 굽 낮은 라벤더색 샌들을 들고, 나머지 한 손은 그의 팔 밑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옷은 연푸른 바람에 살랑거리고 부풀어 올랐다. 아니, 부풀어 올랐다기보다 그녀의 몸에 한쪽으로 달라붙어 있었고, 부드러운 바람이 그녀의 맨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둘은 팔짱을 살며시 끼고 걸으며 간혹 다리가 부딪혔고, 이리저리 씰긋대는 물결은 둘의 발가락을 간지럽히거나 복사뼈를 차갑게 씻어냈다.
해변의 중간쯤에서, 그녀는 발꿈치를 틀어 몸을 반쯤 그에게로 향했다. 한 손으로 비스듬히 머리에 걸쳐진 챙이 넓은 흰색 모자를 잡으며, 반쯤 그를 향한 채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의 얼굴 구석구석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얼굴 표정은 평화롭고 입가에 웃음이 번졌으며, 눈을 감았다 뜨는 그녀의 속눈썹에 빛이 걸려 있었다. 일 이초 동안의 그 눈길은 그를 붙잡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지어본 적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의 머리는 바람에 제멋대로 나풀대고 이마는 땀이 송송 솟아 있었다. 그녀는 이내 그의 이마에 내맺힌 땀방울을 손수건으로 찍어냈다. 그녀 손목 주위로 은팔찌가 뱅그르 돌며 그녀의 팔꿈치까지 내려갔다. 그는 기분이 평온하고 야릇해졌다. 어떤 다른 차원으로 던져진 느낌이었다. 조심스레 다룰 필요가 있는 그런 순간이었다. 그 순간은, 어떤 말로 채우기보다는 침묵이 오히려 감정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구름사이로 퍼져 나온 노란 햇발이 물 위로 떨어져 이랑지는 파도의 결을 켜켜이 드러내고, 모래사장을 금빛으로 감쌌다. 부분적으로 그늘진 그녀의 얼굴과 손수건을 쥔 손,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목선, 더 밑으로 너풀거리는 치마 가장자리를 보자 느닷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고, 손발이 꼼지락거리고 몸은 간질거렸으며 피는 심장으로 몰려들었다. 둘만이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코끝을 그의 코끝 가까이 대고 ”사랑해! “라고 말했다. 그녀의 뺨은 방금 뛰어온 듯 상기되어 붉었고, 눈썹은 짙고 눈동자는 생동감이 있었으며 마스카라를 칠한 속눈썹은 미세하게 떨렸다. 그도 사랑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오늘의 이 순간을 친구들에게 설명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워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하고 미소 지었다. 환희는 몸 구석구석을 물속에 잉크방울처럼 풀어졌다. 그 순간의 '사랑해'라는 말의 강렬함은 이후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나무 숲 벤치로 다가갔다. 솔향 머금은 공기가 산들바람을 타고 왔다. 둘은 나란히 벤치에 앉아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편편히 떨어지던 햇빛은 서쪽으로 기울고, 반사된 물결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헤엄치고, 저물어가는 황금빛이 나지막한 마을 위로 번져가고, 저녁노을의 황홀한 색감 속으로 비행기가 유유히 미끄러져 갔다.
그는 준비한 반지함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고 목소리는 메었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흘러내렸을 상상의 머리를 쓸어 올리거나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승낙을 기다렸다. 마치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언제 칠지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평소 하지 않던 말을 속삭이며 청혼을 받아들였다. 눈가에는 눈물이 글썽였던 거로 기억한다. 이 부분에서 뒤늦게 기억이 채색되었을 가능성도 있긴 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매력적이야!"라고 말했다. 그 말에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자신을 두고 한 말인지 그 상황을 두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뭐가 어떻게 됐든, 그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말했고, 상대방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의 몸에 맞닿은 그녀의 몸은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2010년 여름의 끝자락 저녁, 그러니까 지금부터 대략 14년 전, 그의 나이 서른다섯이었다. 언젠가처럼, 호텔에서 누군가와 이틀을 보내고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진 않았다. 그 사람 이후에도 다른 사람을, 또 그 사람 이후에도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며 밤을 보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자신이 운전하는 걸 잠자코 지켜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그가 기어를 잡고 있으면 그녀의 손이 그 위로 포개지고, 차선을 바꿀 때는 그녀도 주변을 둘러봤다. 사라져 가는 햇빛에 둘은 눈이 부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식장에서 딸의 손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와 그녀는 서로만이 이해하는 미소를 주고받았고, 그는 그녀의 왼손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신혼여행길, 벅찬 감동으로 마음이 한껏 부풀어 올랐지만, 동시에 삶의 어떤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이전으로는 결코 되돌아갈 수 없을 이상한 아쉬움도 느꼈다. 그날 이후, 그들은 어디로 향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치 생애 첫 기차여행에 오른 듯, 기차가 역에 설 때마다 창밖을 유심히 살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 들떠 보이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도착한 역이 어떤 곳인지, 다음 역은 어떤 곳인지, 어디서 내려야 할지 모르는 채,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상대방의 마음은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두 사람 감정들의 미묘한 위치관계는 어떤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나아가는 듯했다.
아참, 한 가지 잊을 뻔한 이야기지만, 제주도 여행길 그날 그녀의 기억은 조금 달랐다. 투명한 호텔 유리문을 지나 하얀 접이의자가 줄지어 놓인 잔디를 가로질렀을 때, 그녀는 마음속으로 미묘한 불확실성을 느끼고 있었다. 해변에 다다른 그들이 맨발로 거닐던 오후는 가을치고는 약간 더웠다. 지평선까지 아득히 이어진 하늘은 하얀 구름이 간혹 태양을 가렸고, 그러다 다시 태양이 비추면 모든 것을 눈부시게 밝혔다.
그녀는 한 손에 하늘색 샌들을 들고 나머지 한 손을 그의 팔 밑으로 넣었지만, 평소와 달리 그의 팔이 왠지 모르게 굳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변의 중간쯤에서 그가 걸음을 멈췄을 때, 잔잔한 파도가 그저 발가락을 간지럽혔을 뿐이다. 노을빛이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모래사장에도 은은하게 반사되던 그때,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반지 상자가 노을빛에 반짝였던 것은 분명했다. 그녀가 본 그의 손은 살짝 떨리는 듯했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망설이는 듯한 초조함이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벅찬 감정으로 흔들리던 그의 눈빛, 그리고 그 순간의 침묵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녀는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었다. 오히려 그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그녀였다. "사랑해"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왔고, 그는 눈물이 글썽였던 것 같다고 그녀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만약 지금까지 두 에피소드를 통해 제시된 '사랑은 격렬한 감정의 동요로 시작되며, 상대방에 대한 배타적 소유를 바란다'는 이야기에 별 감흥이 없다면,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려 한다. 하지만 혹시 뭔가 아쉽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을 위해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겠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은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사랑이 생겨나는 온갖 양태들 가운데, 이 성스러운 질병을 일으키는 온갖 원인들 가운데, 한 가지는 이따금 우리를 지나는 흥분(agitation)이란 격렬한 입김이다. 이 순간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연히 서로 기쁨을 나누는 사람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할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사람이 과연 그때까지 다른 사람보다 더, 또는 다른 사람과 같은 정도로 우리 마음에 들었는지 아닌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기호가 배타적으로 변했는지의 여부일 뿐이다. 프레보 가게로 가는 마차에 타고 있을 때 스완은 자신이 이미 그전과 같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 자신이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태어난 인간이 그에게 딱 달라붙어서 그와 함께 있었는데, 아마도 그는 그 새로운 인간을 떼어낼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