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 00 AM

마들렌과 비스킷, 그리고 사랑을 위해 기꺼이 범해지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by 김영


하나의 기억.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오후의 서점이었다. 서점에는 나른한 소음과 희미한 종이 냄새가 안개처럼 감돌았고, 따뜻한 우드 인테리어 조명 아래에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듯 책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단정한 이마, 외까풀의 갸름한 눈매, 그 속에 맑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 균형 잡힌 콧대와 코끝, 그리고 마치 실수 없이 한 번에 그려낸 듯 선명한 립스틱의 입술. 그녀는 헐렁한 브이넥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책장 사이를 지그재그로 가로질러, 온갖 종류의 소설들이 두 줄로 빽빽하게 늘어선 서가로 다가왔다. 그녀가 지나치는 서가의 책들은 갖가지 색의 책등을 뽐내며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앞에는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 비극적 사랑의 운명, 집으로 돌아가는 고난의 서사, 낯선 행성에서의 고독한 생존기, 그리고 찰나의 오해가 빚어낸 속죄의 세월을 담은 이야기들이 빼곡한 책등으로 엮여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서가의 한 부분에 머문다. 잠시 후 그녀는 책등을 살피더니, 망설임 없이 책 한 권을 빼든다. 그것은 오랑이라는 도시에 전염병이 발생하여 도시가 폐쇄되고, 그 확산과 억제 과정에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드러나는 내용의 책이다. 그녀는 책을 능숙하게 빼내어 하얀 팔뚝을 움직여 왼손으로 받쳐 들고는 겉표지를 살핀다. 이윽고 조용히 첫 페이지를 펼쳐 목차로 내용을 짐작하더니, 가름끈이 있는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다.


그는 조급함을 느꼈다. 이 순간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마치 얼마 전 카페에서 마주쳤던 여인이 말을 걸기도 전에 떠나버릴까 초조해하며, 몇 분의 지연이 운명의 상실로 이어질까 염려했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가 보기에 그녀는 나이에 상관없이 남자들의 관심을 끌 만큼 아름다움을 갖춘 데다 교양까지 겸비했다고 생각했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름다움까지 갖춘 것.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실은 아름다움이었다.


당시 그는 경박스러울 정도로 호르몬에 강력히 지배당하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로는 성적인 관심이 없는 듯 행동했지만, 온갖 것들을 그것과 연관 지었다. 혹시나 하는 호기심에 친구와 밤거리를 쏘다니고, 잠들기 전 자주 뒤척였다. 관능적 상상은 아무리 쫓으려 해도 달아나지 않고 머리 위에서 윙윙대는 파리처럼 맴돌았다. 그에게 호감 가는 여자는 누군가를 못 견디게 좋아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육체적인 충동을 일으키는 존재였다. 그는 마치 가게에 진열된 물건에 마음을 빼앗긴 듯 그녀를 바라보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처럼 그가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성가신 행동들이 있었다. 그는 일부러 길을 묻거나 사소한 부탁을 하며 대화를 시작했다. 조금 더 가까워지면 "추워 보인다"며 옷을 건네거나 어깨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떼어주는 등 가벼운 스킨십을 시도했다. 헤어질 때는 "오늘 대화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뵐 수 있을까요?" 혹은 "왠지 모르게 끌리네요, 다음에 가볍게 식사라도 같이 할까요?"라며 다음 만남을 유도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서는 안부 메시지를 보내 다음 날 일정을 묻기도 했다. 다음 만남에서는 시나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하며 분위기를 잡거나, "이번에 차를 새로 뽑았어요"라며 은근히 경제력이나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동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셰익스피어, 미켈란젤로, 피카소, 모차르트처럼 위대한 예술가 또한 이성을 유혹하기 위해 글을 짓고, 조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었을 테니. 결국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행위는 본질적으로 구애의 한 방식인 셈이다.


생각해 보면 그가 저지른 여러 가지 실수는 섹스에 대한 집착이 가속 페달처럼 작용한 결과였다. 그 가속 페달은 그가 권태로움을 느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불행한 사람은 다른 이유로 불행하고, 행복한 사람은 같은 이유로 행복하다"는 유명한 말을 "헤어지는 사람은 다른 이유로 헤어졌고, 만나는 사람은 같은 이유로 만났다"로 바꿔 말해도 좋을 만큼, 섹스는 강렬한 만남의 이유였다. 그는 하반신 불구의 남자와 아름다운 여인이 결혼하는 뉴스를 보고 "저게 말이 되는 얘기야?"라고 반문하며, 아마도 남자의 돈을 보고 결혼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성적인 관계가 시들해지면 보이지 않았던 나머지 수만 가지 관계가 새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 자체가 아예 종결된다고 그 당시에는 믿었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지금 주저하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게 될 테고, 결혼 생활이 예전 같지 않을 때면 멍하니 아내를 품에 안은 채, 서점에서 그저 바라만 보았던 그녀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에게 그녀는 삶의 악보를 내림표에서 올림표로, 다시 올림의 도돌이표로 만들 유일한 여인일 수 있다. 그녀와의 체험은 풍부한 화음으로 공명을 일으킬 터였다. 그 공명은 한쪽이 다른 쪽을 완전히 지지해 주는 화성법이 아니라, 독립된 생명을 가진 선율이 동시에 울리는 대위법의 형태일 거다. 어찌 보면, 둘의 사랑은 재즈의 즉흥연주를 닮을 수도 있다. 정해진 악보도 없이, 서로의 호흡이 악보가 되어 앙상블을 이루는 것처럼. 그의 모든 감각은 그녀를 향해 튀어 오르고 있었다. 같은 재료와 같은 문제로 이루어졌던 그의 삶은 그녀라는 새로운 변수를 만나 완전히 변주될 것이다.


용기를 낸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첫마디가 "책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였는지, "이 작가 좋아하세요?"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의 갑작스러운 접근에도 그녀는 불편한 기색 없이, 오히려 조심스러운 그의 태도에 긍정적인 인상을 보였다. 그는 자신을 가볍거나 섣부른 사람으로 보이지 않으려 애썼고, 그녀 또한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는지 몇 마디 응답했다. 그 후 몇 차례의 만남이 이어졌고 한 달이 채 안 되어, 그들은 차 안에서 첫 입맞춤을 나누었다. 그는 그녀에게 비칠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불안한 탐색을 하면서도, 그녀에게 좀 더 다가갈 기회를 엿보았다. 그녀를 관찰할수록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그녀의 저녁 계획, 왜 아직 미혼인지, 좋아하는 드라마는 무엇인지 등 그녀의 사생활과 배경이 궁금했다. 그녀라는 퍼즐을 맞추려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여기서 생각해 볼 지점이 있다. 과연 그녀와의 대화만으로 그녀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 만남의 횟수를 늘린다고 절대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을까? 부분의 합은 전체보다 작거나 같다. 그는 그녀를 만나 부분적으로만 그녀를 읽어낼 뿐이다. 게다가 그가 그녀를 읽어낸다는 것은, 뒤집어 말해 그녀가 그에게 자신을 표현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표현은 직접적일 수도, 때로는 비유적일 수도 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지금까지 자신이 판단해 온 방식대로 해석한다. 자신만의 알고리즘으로 필터링하거나, 반복적으로 전달된 내용을 균질화하여 받아들인다. 여기에 별자리, 혈액형, MBTI 같은 요소를 더할 수도 있다.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만난 후 그의 예전의 관심 목록들은 자연스레 낮은 순위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이란 게 어떤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면 그녀와의 인연을 위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내고, 별의별 짓을 다하기 마련이다. 그녀도 그런 그가 싫지는 않았다. 그리고 두 달이 흘렀을 무렵, 두 사람은 첫 여행길에 올랐다. 설렘과 미묘한 불안감을 안고 차에 오른 그들은 서로를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호텔에서 이틀을 함께 보냈다. 남녀가 잠자리를 함께하고 나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는 미묘하지만 감출 수 없는 변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전보다 더 자연스러운 스킨십이 가능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어색함과 불편함에 상대를 피하거나, 혹은 상대를 더욱 소유하려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다음 날, 그들은 단지 아는 사이로 돌아간 듯했고,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별한 갈등이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관계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났다. 헤어질 때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와 비슷한 만남과 이별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잠시 만나 마음으로만 품었던 그녀, 친구의 연인으로 욕망했던 그녀, 그리고 한 관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다가갔던 그녀까지. 그들은 서로 만나기 전에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서로 사랑하기도 했다. 그 점은 의심치 않는다.


그의 충동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의 성장과정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그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하면 내용이 너무 광범위해지거나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용을 듣다 보면, 오히려 그 편이 그의 행동을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1984년 여름, 그가 아홉 살이던 해의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다. 대학가에서 조금 떨어진 하숙집에서의 경험이다. 그곳은 창문 밖으로 가끔 자전거 소리가 나는 조용한 동네였다. 어머니는 가족이 쓰는 방 두 칸을 제외하고 남는 방 두 칸에 하숙을 치었다. 하숙방에는 앉은뱅이책상과 비키니장, 이불과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마당에는 옹색하나마 작은 정원과 능청능청 아래로 늘어진 빨랫줄이 있었다. 엇비슷하게 자란 나무와 물을 다람다람 머금은 빨래 사이로 골목길이 보였다. 골목길에는 줄넘기하며 뛰어오르는 아이들과 출렁이는 줄이 보였다 사라졌다. 하숙생들은 같은 집에 살면서 자연스레 친했다. 자정 무렵까지 수다를 떨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흥얼흥얼 댔다. 그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이던 밤이면 마루를 삐걱대며 걷는 소리와 정해진 시간에 울리는 괘종소리를 듣곤 했다. 묵직한 둥근 시계추가 간드작간드작 좌우를 오가면 태엽이 풀리고 시곗바늘이 움직여 정해진 위치에 도달하면 타종이 울렸다. 괘종시계가 열 번을 쳤으니, 한 시간 뒤엔 열한 번을 칠 차례였다. 예전에는 그렇게 소리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하곤 했다.


이제는 소리가 전혀 다른 풍경을 그려낸다. 그에게는 특히 그랬다. 소리는 시간을 가늠하는 척도를 넘어, 다른 감각들과 뒤섞여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힙합 비트를 들으면 빈민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몸을 들썩이는 모습이, 디스코 음악을 들으면 회전하는 미러볼 아래에서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몸들이, 그리고 록 음악을 들으면 자유를 향한 함성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마찬가지로, 다른 감각들 역시 기억을 불러왔다. 계절의 변화는 낙엽 밟는 소리나 매미 소리로, 하루의 시작은 이른 아침 세상의 소란스러운 소리로, 그리고 어둠이 내릴 무렵 풀벌레 소리가 밤을 알렸다. 냄새 역시 강력한 촉매였다. 비가 내린 뒤 흙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으면 어릴 적 비 맞고 놀던 기억이 떠오르고, 어떤 향수 냄새를 우연히 맡으면 누군가와의 추억이 밀려온다. 또한, 어릴 적 읽었던 그림책의 삽화를 다시 보면 책의 내용뿐 아니라 그림을 보던 그 순간의 마음, 심지어 책에서 나던 오래된 종이 냄새까지 떠오르곤 했다. 새 책을 펼쳤을 때 나는 독특한 잉크와 종이 냄새는 자연스레 집중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다음 이야기는 자칫 폭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에피소드이다. UN 아동권리위원회는 모든 형태의 체벌 금지를 권고했고, 우리나라에서도 2011년 이후 학교 체벌이 전면 금지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 이전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교에서는 폭력을 쓰면 안 된다고 가르쳤지만 학창 시절 내내 폭력은 끊이지 않았다. 교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폭력은 시작되었다. 등굣길 복장 검사를 핑계로 운동장에서 공개적으로 구타와 체벌이 이루어졌고, 선배들은 군기를 잡는다며 교내 곳곳에서 폭력을 휘둘렀다. 폭력은 안 된다고 말하던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훈시를 시작했고, 간혹 이성을 잃으면 교사의 권위를 이용해 거리낌 없이 체벌을 가했다. 그들은 사랑해서 때린다고 말했다. 가끔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 가정방문도 했다. 담임선생님이 집에 오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술상을 차리고, 비상금을 모아둔 돈 봉투를 준비했다. 선생님은 거나하게 취해 돌아갈 때, 어디에서도 지어 보인 적 없는 환한 미소와 함께 그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다.


친구들끼리도 싸움은 일어났다. 일은 대개 덩치가 크거나 힘이 세 보이는 아이가 얕잡아 보이는 아이에게 시비를 걸거나 괴롭히는 것으로 시작했다. 덩치 큰 아이들은 메달이라도 딴 듯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다녔다. 상대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태도였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에서 약해 보이는 아이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비굴하게 상대의 승리를 미리 인정하며 싸움을 피하거나,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 아니면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기를 내어 부딪혀 보는 방법이었다.


그는 두렵지만 피하지 않고 스스로 감당하는 길을 택했다. 자존심을 건 싸움이었다. 아이들은 모여들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 모욕당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승리자의 입장이 되어 열광했다. 물론, 그의 선택에는 공포가 함께했다. 그 세계는 거칠고 잔인하고 격렬한 곳이었다. 공기도, 냄새도, 언어도 다른 세계였다. 둘은 서로에게 두 팔을 휘두르며 엉겨 붙었다. 입술이 터지고 눈은 멍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부당한 힘에 굴복할 것인지, 비겁하게 피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것인지 선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피하지 않고 자존심을 세우는 쪽으로 결정을 하는 순간은 무자비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어쨌든 그 싸움을 통해 그는 자신이 한 명의 개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가 중학교 교복을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그런 비슷한 일은 몇 번 더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미래란 곧 입시 준비를 의미했다. 수업 시간에는 졸음을 참았고, 야간 자율 학습은 빠지지 않았다. 시험 기간에는 꼬박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그 시기는 그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지 돌아볼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남들만큼의 노력을 하고 운까지 따라준 덕분에, 그는 누구나 알 만한 대학의 전자공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삶에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첫째로, 부모에게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설명해야 하는 의무에서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마음 내키는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었으며, 집에 들락날락하며 섣부르게 찧고 까불었다. 강의 시간 변경이나 휴강, 동아리 활동, MT 등 수많은 핑곗거리가 항상 준비되어 있었다. 둘째로, 따분했던 동네를 벗어날 수 있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처럼, 그의 동네가 흥을 떨어뜨리고 상상력을 얼어붙게 했다면, 신촌은 전혀 달랐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은 활기찬 도시였다. 그 일은 열광, 감동, 그리고 낭만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아름다운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나, 어떤 반짝이는 행동에 그녀의 호감을 얻고, 애틋한 사랑 끝에 결실을 맺는 식의 상상을 자주 했다.


홀 안에 조용히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무대 조명이 켜지자, 밴드 멤버들이 차례로 무대에 나타난다. 그들을 비추는 조명은 시시각각 색을 바꾸며 빛나고, 티셔츠 단추를 서너 개 풀어헤친 보컬이 무대 중앙에 선다. 그의 양옆에는 곡의 중심을 잡아주는 베이스와 클라이맥스를 이끄는 기타가, 그 뒤로는 곡의 리듬과 흐름을 조율하는 드럼과 화려한 사운드를 더하는 키보드 세션이 자리한다. 다채로운 불빛 아래, 질주하는 기타와 건방진 듯 가볍게 리듬을 타는 베이스, 힘 넘치는 드럼, 그리고 건반 위를 빠르게 오가는 키보드 연주가 하나의 하모니를 이룬다. 이들의 연주는 단순한 합주를 넘어 깊은 유대와 친밀감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잠시 후, 조명은 무대 한가운데를 비추고 그와 음악만이 남는다. "You're so fucking special. But I'm a creep. (넌 존나게 특별해. 하지만 난 병신이야)" 객석은 보컬의 일거수일투족에 홀 안이 들끓는다. 음악에 취한 그는 문득 어떤 시선과 마주친다. 그녀는 숨을 죽이다가 곡이 끝나자 터져 나오는 함성으로 그의 열정에 화답한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기를 바라며, 그는 마치 바람난 고양이처럼 허구한 날 밤거리를 헤맸다. 뭔가 금지된 일을 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거리낌 없이 술집을 드나들고 성인 영화도 보았다. 쾌락의 문을 통과할 때마다, 그는 낯설지만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감정들이 자유롭게 부풀어 올랐고, 쇼윈도에 비친 그의 얼굴은 전보다 밝아 보였다. 막연하게나마 행복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가 꿈꾸는 자유와 닮은 자유를 느낄 것 같은 여자들도 더러 만났다. 그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여자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학교생활은 어떨지, 집에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가슴은 어떻게 생겼을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만지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하곤 했다. 그렇지만 매번 그녀의 손을 잡을, 입맞춤을 할 결정적인 찬스를 놓쳤다. 그녀가 허락하는 때를 눈치채지 못하고, 눈치를 채도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은 얼어버렸다. 두 볼이 붉어지면, 이내 그녀의 눈초리는 실쭉해지곤 했다.


생각해 보니 그런 날도 있었다. 그날도 스포츠신문을 사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상상했던 눈부신 영혼이 있었다. 그녀만이 도드라지게 시야로 다가오고 다른 사물들은 뒤로 물려났다. 그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바로 그가 찾던 그녀라고. 순백의 상쾌함이 불어왔고, 가슴이 떨렸다. 그녀에게서 거리를 둔 채 흘깃 곁눈질하며 그녀와의 앞날을 생각했다. 그 앞날은 모든 낭만적인 것들이 두루뭉술하게 압축된 형태이다. 그것도 잠시, 그녀 옆으로 속 빈 강정처럼 허우대만 멀쩡하게 보이는 놈이 다가왔고, 둘은 다정하게 말하며 사라졌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미소 지을 때 제멋대로인 치아가 볼만했던 거 같다.


그때부터인가, 변함없이 지속되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그의 감정은 항상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예컨대, 상대방의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을 놓치지는 않지만 그에게 귀를 기울이며 속으로는 딴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속이 깊은 아이예요"라고 말하곤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찌나 속이 깊은 지 그 속을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판교의 한 IT 기업에 취직했다. 남들이 하는 웬만한 노력은 다 했다. 필요하다는 자격증을 취득하고 취업 스터디에도 빠짐없이 참가했으며, 성실성과 적극성을 강조한 자기소개서에도 공을 들였다. 물론 호감이 오고 간 여자가 있었지만, 취업 준비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첫 월급으로 부모님의 낡은 TV를 교체하고 연금저축도 시작했으며, 한두 해가 지나 할부로 차도 구입했다.


그의 업무는 주로 애플리케이션의 버그를 수정하고 업그레이드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고객들의 피드백에 민감하고 즉각적인 반응이 필수였기에, 그는 늘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업무를 빠르게 진행했다. 회의는 대면 방식보다 비대면으로 이루어졌으며, 회의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설계와 솔루션을 논의하거나, 현재 진행 중인 업무 프로세스를 평가하고, 브레인스토밍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주로 접하는 사람들은 동료 직원 외에 다른 프로그램 개발자나 베타테스터였으며, 소통은 대부분 메신저로 이루어졌다. 섬세함과 끈기, 꼼꼼함과 강박적인 주의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순간은 새로운 기능을 테스트할 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져 나올 때였다. 그럴 땐 늘 고민에 빠졌다. 촉박한 마감 기한에 맞춰 서둘러 코드를 완성할 것인가, 아니면 시간을 더 들이더라도 기능적으로 더 뛰어난 코드를 작성할 것인가. 하지만 정작 그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인터넷이나 와이파이가 불안정할 때였다.


회사 사람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대학 동아리 선배였던 상사와의 관계는 유독 좋았다. 선배는 늘 "야, 너 진짜 결혼 안 할 거야?" 하고 물었고, 그는 그때마다 "예쁘고 착한 여자만 있으면 당장이라도 해야죠!" 하고 능청스레 답했다. 그러면 선배는 픽 웃으며 "하여간 넌 결혼 못 한다"라고 핀잔 아닌 핀잔을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는 뜬금없이 말했다. "아는 동생이 있는데, 편하게 한번 만나볼래?" 그러면서 무심한 듯 전화번호를 건넸다. 막상 번호를 받고 나니 어떻게 연락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한참을 끙끙 앓다가 겨우 문자를 써 내려갔다.

'은서님, 안녕하세요! 선배님에게 소개받은 서준하라고 합니다. 다음 주에 시간 괜찮으시면 만날 수 있을까요?'

쓰고 나서 보니 뭔가 영 아니다 싶어 바로 지워버렸다. 정중하고 조심스럽긴 한데, 어딘가 모르게 뻣뻣하고 건조하게 느껴져서였다.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다시 문자를 고쳐 보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소개로 연락드리는 서준하라고 합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은서님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분위기 좋은 카페를 알고 있는데, 같이 차 한잔 하실래요? 편하게 생각하시고 답장 주세요.'

조금 더 편안하고 부드러운 톤으로 바꾸고는, 전송 버튼을 누르려다 또다시 망설였다. 결국, 다시 문자를 고쳐 보냈다.

안녕하세요, 은서님! 선배님을 통해 소개받은 서준하라고 합니다. 혹시 편한 시간에 커피 한잔 하실 수 있을까요? 이번 주말이나 다른 날도 괜찮으니, 은서님 편한 날 알려주세요. 부담 없이 연락 주세요. 뵙기를 기대하겠습니다.


한 두 번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그가 아는 곳으로 약속을 정했다. 장소는 그녀의 직장에서 멀지 않은 '모던 블루'라는 카페였고, 시간은 이틀 후인 금요일 오후로 잡았다. 그는 약속날 길 안내 링크와 카페 사진을 첨부해 보냈다.


이틀 뒤, 카페에 들어서자 사장이 "이야, 정말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라고 알은체를 했다. 따뜻한 조명아래 잔잔한 소음이 흐르고 있었고, 꼬숩한 빵내음과 달콤한 초콜릿 향기, 갓 볶은 원두 향이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인터넷 평점보다는, 적당히 시끄럽고 적당히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주변 소음에 대화가 묻히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적막해서 대화가 끊길 염려도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전에 사귀었던 여자를 만날 일도 없는 곳이다.


잠시 후 그녀가 도착했고, 카페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는 손을 흔들려는 듯 한 손을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적절하지 않은 거 같아 반쯤 올려 가볍게 손짓을 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미리 본 그녀의 모습보다는 피곤하고 건조해 보였다. 그렇다고 인스타그램 속 모습이 과장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아마도 처음 만나는 자리여서 긴장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역시 그녀에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녀는 중견회사의 회계팀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른이 갓 넘은 나이로, 그보다는 네 살 어렸지만 얼굴은 여전히 20대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말쑥한 옷차림에, 완만하게 경사진 이마, 날렵한 콧대, 무언가를 기다리는 까막까막한 눈망울, 투명한 살결, 어깨까지 내려오는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의 그녀가 그의 시선 안에 선명하게 등장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카페 안을 둘러보다 그를 미세하게 위아래로 훑었다. 그 또한 그녀의 시선을 모르는 척 바라보았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가 기다려 온 일이 시작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음료를 추천하려 메뉴판에 손가락을 짚어 내리며, 그녀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긴장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일에 대해 궁금증을 드러내다 점차 사적인 이야기로 넘어갔다. 편안해진 분위기 속에서 대화는 자연스럽게 봉준호, 이창동, 홍상수 감독에 대한 이야기와 무분별한 댓글 문화, 그리고 페미니즘으로 흘러갔다. 그는 어떤 말을 무심코 꺼냈다가 '이 정도의 TMI까지 말할 사이인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아마 이런 이야기였던 거로 기억난다. "사랑이라는 게 결국 서로에게 끌려서 시작해, 마지막엔 파트너십으로 변하는 거 아니겠어요?"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투명한 설탕 결정이 박힌 비스킷을 차에 살포시 담가 먹으며 답했다. 낭만적 사랑과 동반자적 사랑 외에도 이타적인 사랑과 배타적 사랑도 있다고, 그리고 자신은 모르지만 다른 형태의 사랑도 많을 거라고. 그러면서 "방법이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이성복 시인의 시구를 인용했다. 그는 무슨 말인지 갸우뚱거리며 미소 지었다.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제각기 인 것처럼, 사랑도 제각기 방법만이 있다고, 그래서 방법이 있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며, '차이의 반복'이라는 말을 했던 게 기억난다. 그는 이 말을 사랑은 정해진 방법이 없다는 것쯤으로 이해했다.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풍부했다. 짙은 눈동자는 입매의 움직임보다 한 발 앞섰다. 함께한 두 시간 동안 다양한 손님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했던 것 같지만, 둘의 주의를 흩어 놓지 못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녀의 찻잔 밑에는 비스킷이 풀어져 베이지 색 덩어리와 희미한 코코넛 향이 남아있었다. 둘 사이 대화 중 사용된 단어는 그 단어에 담긴 의미보다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는 그녀가 여느 여자와는 다르다고 느꼈고, 그녀도 아마 그에게서 비슷한 것을 읽었다.


카페를 나선 건 이미 한밤중이었다. 상쾌하면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바람이 둘의 얼굴을 스쳤다. 길가에는 점포 입구에서 인도 쪽으로 내건 현수막이 싱그러운 초여름의 미풍에 펄럭였고, 술집을 오가는 사람들과 길 한복판에 서서 이야기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가 가볍게 술 한잔을 권했고, 그녀는 근처에 괜찮은 펍이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펍으로 향했다. 펍은 세 개의 작은 골목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건배했다. 그녀는 첫 잔으로 흑맥주를 마신 뒤, 두 번째 잔으로는 과일 향이 나는 에일맥주를 시켰다. 그는 일이 잘 되어간다고 생각하고는 선배와 그의 친구들에게 오늘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했다. 다른 이에게 이야기를 하는 자신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안주가 나올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그녀의 얼굴과 밝은 머리칼 위로 카메라 빛이 은은하게 번졌다. 그는 순간 테이블보를 가로질러 빛을 머금은 그녀의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둘은 술을 훌쩍훌쩍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기운이 얼얼하게 올랐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었다. 바로 '믿음의 실체'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녀는 어떤 영화의 대사를 인용하며 말했다. "한 가지를 믿어야 하는데 선택지가 두 가지 있어. 그럼 너는 하나를 결정해야 돼." "그럼 믿음을 조작하라는 거예요? 믿는 척을 하라고요?" "아니, 나는 척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어. 결정하라고 했지." 그녀는 결국 믿음이란 무엇을 믿을지 선택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신을 믿기로 선택하는 순간, 신은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라고. 그렇기에 이제부터는 섹스 없이 아이를 낳거나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도 믿게 될 거라고 했다. 그녀는 믿음이 맹목적이라 검증이 불가능하고, 설령 검증할 수 있다 해도 그 결과를 무시하며 자신이 믿는 바와 다르면 그 중요성을 부정한다고 덧붙였다. 그가 무어라고 대꾸는 했을 텐데 기억나진 않는다. 어쨌든 그녀 말은 그랬던 거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는 상황을 능숙하게 다루고, 자신만의 맥락을 만들어 상대방의 호기심과 호감을 이끌어내는 데 재주가 있었다. 지루한 이야기 속에서도 재미있는 부분을 찾아내 대화를 이어가는 그녀의 능력 덕분에, 상대방은 때때로 스스로를 근사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즉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마저도 실제보다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던 셈이다.


그는 이틀이 지나기 전에 그녀에게 다시 연락했고 두세 번을 더 만났을 때 교제를 제안했다. 계속 만나야 할 이유가 헤어질 이유보다 훨씬 많았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그날, 그는 그동안 만났던 여성들을 되돌아보았다. 영 아니었던 여성을 제외하고 제법 괜찮은 여성이 한두 명은 있었지만 결정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결정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결과, 그녀들을 부드러운 조명의 테이블로, 자잘한 거품을 일으키는 초록빛 바닷가로, 꽃이 만발한 정원으로, 미소를 머금은 사람들이 보이는 결혼식장으로 이끌지 못했다. 이번만큼은 누군가가 그녀를 낚아채도록 둘 수는 없었다. 그녀를 놓치고 오랫동안 특별히 그의 눈에 들어오는 여자가 없으면, 그녀를 생각할 게 뻔하고 그 생각은 끈질기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