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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우연이라는 악마'

by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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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1980년 텍사스를 배경으로 은퇴를 앞둔 보안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내 나이 스물다섯에 보안관이 됐다. 새파란 나이지. 조부도 부친도 같은 길을 가셨다. 난 아버지와 같은 때 일했다. 아버지 플래노는 여기서 자부심이 크셨던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깐... 옛날 보안관 몇은 총을 멀리했다. 믿기진 않겠지만 짐 스카보로도 그랬다. 개스톤 보이킨스도 코만치 마을에서 그랬고, 난 왕년 보안관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다. 보안관치고 한 번쯤 비교 안 해볼 사람 있나? 그들이라면 이 시대를 어떻게 꾸릴까 하고... 난 몇 년 전 한 청년을 사형대로 몰아놓었다. 내가 체포하고 내가 증인을 섰지. 그는 열네 살 소녀를 죽였다. 신문에 선 "격정의 범죄"랬지만 나는 격정 같은 건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내 누군가 죽일 생각이었다면서 출옥하면 또 죽이고, 지옥 가겠다고 씹어뱉듯 말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혔지. 요즘 범죄는 딱히 동기도 없다. 물론 두려운 건 아니다. 이 짓 하다가 뼈를 묻을 각오니까 다만 무모한 객기로 무의미한 범죄에 장단 맞추고 싶지 않을 뿐. 목숨 내놓고 이러든가. "까짓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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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남자가 체포된다. 하지만 보안관이 방심한 틈을 타 보안관을 죽이고 탈출한다. 그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공감능력이 없는 킬러, 안톤 시거이다. 그는 몸에 피가 묻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항상 자신의 논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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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산소통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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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를 사냥하는 남자의 이름은 르엘린 모스이다. 총알에 빗맞은 노루를 뒤쫓다가 멕시코 갱단의 마약 살해 현장을 우연히 목격한다. 그곳에서 위치 추적기가 숨겨진 200백만 달러의 돈을 발견한다. 노루가 명중이 되었다면 이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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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현장에 보안관 에드 톰벨이 도착하여 살핀다. 그는 지식과 경험이 많은 베테랑이다. 총의 구경과 사건 현장에 남겨진 모스의 차를 통해 단서를 잡고 사건을 추적해간다. 킬러가 모스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도 직감적으로 안다.


노인은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는 경험이 많아서 정확히 추리해낸다. 그렇게 경험이 많고 똑똑한 에드는 뒤로 갈수록 무력하게 되고 실제로 그가 해결하는 것은 없다. 다양한 지식과 경험조차 쓸모없게 된 세상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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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요? 왜요? 그냥 정해 뭘 걸고 하는지는 알아야죠 어서 정하시오 내가 정해주면 불공평하니까 내기 건 게 없는데 걸었소 댁 목숨을 걸었지 모르고 있을 뿐 몇 년도 동전인지 아시오? 아뇨 1958 여기 오는 데 22년 걸렸지. 이제 왔지만... 앞 아니면 뒤잖소 어서 정하시오 이기면 뭘 얻나 알고 싶소 뭐든지 뭐라고요? 뭐든 얻는다고, 불러 좋소 앞면 합시다


이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이 담겨있다. '안톤 시거'는 희대의 연쇄 살인마, 악마 같은 인물인데 가게에 들어가서 상점 주인의 별거 아닌 말에 심사가 뒤틀려서 계산대로 다가와 얘기한다. 동전을 던질 테니 앞과 뒤 중에 하나를 맞혀보라고 선택을 강요한다. 상점 주인은 주저하다가 선택을 억지로 하게 된다. 주인의 죽고 사는 문제는 오직 동전의 앞뒤에만 달리게 된 것이다. 보통의 악마라면 그냥 죽여버리면 되는데 굳이 앞뒤를 맞추라고 한다. 지금까지 상점 노인이 살아온 삶의 경험이나 지혜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노인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앞뒤를 선택하는 것밖에 없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도덕적 합리가 통하던 시대에 살았던 노인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다. 요즘 것들이 살아가는 풍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런 풍토를 그들이 넘겨준 것도 그들인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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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시거는 통화내역을 단서 삼아 모스가 지나갔던 길을 추적한다. 어떤 모텔 근처에서 돈 가방에 숨겨진 위치 추적이가 반응을 한다. 총격 끝에 서로 부상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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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나 좀 보지 누구요? 잘 알 텐데 얘기 좀 하지 할 말 없소 있을 걸. 내 행선지 아나? 왜 알아야 하지? 너 있는덴 알아 어딘데? 강 건너 병원, 하지만 거긴 안가 어디 갈지 아나? 알만하군 좋아 가도 없어 어딨든 달라질 건 없어 그럼 거길 왜 가지? 결과는 뻔히 알잖아 아니 알 텐데...제안하나 하지. 돈 가져오면 여잔 살려주겠다. 그렇지 않으면 둘 다 살려둘 수 없지. 더 바랄 게 없는 조건일거야. 목숨 부지할 거란 헛된 희망은 걸지 마. 원한다면 응해주지. 내 출현 기대해. 날 찾기 전에 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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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는 여자의 유혹에 방심하다가 돈을 찾고 있는 멕시코 갱단에 어이없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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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올 줄 알았어요. 전 돈 없어요. 푼돈 준 건 진작 다 썼고, 빚만 잔뜩 남았죠. 오늘 엄마를 묻었는데 그것도 외상 졌어요. 그런 건 관심 없어. 좀 앉을게요. 절 해칠 이유 없잖아요. 물론, 다만 약속을 했거든 약속을 해요? 남편한테? 말도 안 돼요. 남편한테 날 죽이겠다고 약속했다고요? 물론... 남편은 널 살릴 기회가 있었어. 한데 살아보겠다고 널 버렸지. 그럴 리가요. 그런 사람 아녜요. 이럴 필요 없잖아요. 하나같이 그 소리군 무슨 소리요? 이럴 필요 없잖냐고 그렇잖아요 좋아 특별히 선심을 베풀지. 정해 와있는 거 보고 사이코인 줄 알았어요. 무슨 짓 할지 짐작했죠. 정해 아뇨 그런 짓은 안 해요 정해 동전으론 결정 못 해요. 당신이 결정해야죠 동전도 나와 생각이 같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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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시거는 백미러를 통해 주변도 살피고, 교통신호의 초록색 불도 꼼꼼히 확인하지만 그마저도 신호를 위반한 차량에 의해 사고를 당한다. 우연히...


이 영화를 본 해에 운 좋게도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데어 윌 비블러드'도 볼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여운이 오래 남는 그런 영화였다. 그 후로 여러번 보았다. 희대의 악마 역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의 압도적 연기와 독특한 단발머리, 입가의 미소, 희한한 살인도구등 잊혀지지않는 요소가 많은 영화다.


보통 악은 혼돈을 표현한다. 악당들은 질서정연한 세상을 파괴하고 혼돈을 만드는 사람이다. 그런데 안톤시거는 혼돈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악당이다. 동전 즉, 우연으로 사람을 죽인다. 자기 의지로 상대를 죽이는 캐릭터가 아니다.인생을 단선적으로 보면 그 끝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은 거부할 수 없는 질서이므로 안톤시거는 죽음을 상징하고, 그것은 혼돈이 아니라 코스모스아닐까?하물며 동전의 길과 인간의 길도 다르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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