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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Carpe Diem ㅡ현재에 집중하라.

by 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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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나는 세상에 대해 이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다.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속에 처형될 위기의 그리스인들을 함께 구하자는 친구의 제안을 거절한 채, 갈탄 채굴사업을 위해 크레타섬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조르바라는 인간을 만나 동업을 하게 된다. 사업은 비록 실패를 하지만 조르바를 통해 실존적인 삶의 태도를 배우는 한바탕의 이야기이다.


조르바와 나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뱀을 숭배하는 이유는, 뱀이 온몸을 땅에 대고서 대지의 비밀을 배로, 꼬리로, 고환으로, 대가리로 알아차리기 때문이거든. 뱀은 늘 어머니 대지를 만지고 접촉하며 그것과 하나가 되지. 조르바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처럼 먹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은 공중에 나는 새들처럼 골이 텅텅 비어있지.

사고와 행동과 관련하여 조르바가 대지를 느끼는 뱀과 같은 존재라면 나는 하늘, 별을 동경하는 새와 같은 존재다. 조르바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대지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인 반면 나는 책을 탐독하며 지나치게 관념에 빠져있는 먹물이다. 모든 면에서 두 사람은 대조적이다. 주인공은 관념어를 쓰고, 책으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사람인 반면 조르바는 거리에서 지혜를 얻는 '거리의 현자'이다. 조르바는 자신이 자유인이만큼 누구를 지배하거나 소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은 하지만 쾌락에 빠지지 않고, 소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납득이 안 간다. 쾌락도 없고 소유하지도 않는데 무엇 때문에 사랑을 하지? 그러려면 보통 사람들은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에게 있어 자유라는 것은 아무한테도 무릎 꿇지 않듯이 어떤 사람도, 심지어는 동물도, 그를 무서워하면 안 된다. 자유는 그를 해방시켜주고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옛날에 나는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소. '저 사람은 터키 사람, 이 사람은 그리스 사람.' 보스, 난 당신 머리털이 쭈뼛 설 만한 짓들을 내 조국을 위해 서슴지 않고 했소. 사람들을 짐승처럼 살해하기도 하고, 마을을 강탈해 불태우기도 하고 여자들을 겁탈하기도 하고, 집 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기도 했소. 왜 그랬을까? 그들이 불가리아인이고 터키인이었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가끔씩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오. ' 이 돼지 같은 자식아,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래, 난 정말 뭔가 배운 바가 있소. 이제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거든. '이 사람은 선량한 사람, 저 사람은 나쁜 사람. 그가 불가리아인 인지 그리스인 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보기엔 모두 똑같은 사람이니까.'

자유는 두려움과 충동으로부터의 자유이다. 두려움의 대상은 국가, 아버지, 신, 도덕, 민족, 이데올로기... 충동의 대상은 술, 담배, 커피, 버찌이다. 조르바는 충동의 대상인 버찌를, 아버지의 돈을 훔쳐서 토할 때까지 먹음으로써 충동을 억제한다. 충동의 대상은 마음만 먹으면 토할 때까지 극단으로 몰아붙여 다시는 생각이 안 나도록 해서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이다. 여자는 사랑하지만 구속하지 않고, 음식은 마음껏 먹지만 식탐에 걸리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먹을 것을 즐기면 식탐 중독자가 되고, 사랑에 빠지면 연애 중독이 된다. 조르바는 이런 것을 극복한다. 쾌락을 좋아하지만 쾌락이 자신을 휘둘리지 않게 한다. 그렇다고 금욕은 안 한다. 금욕주의자를 무섭도록 경멸한다.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반인륜적인 행위를 한다. 그런 중에 자기가 죽인 자의 자식이 구걸을 하는 것을 보고 뒤통수를 맞은 듯 깨닫는다. 조국으로부터, 신으로부터, 애국이라는 광기로부터 도망간다. 조국과 신, 이념적 가치로부터 도주한 것이다. 이런 것을 알려면 책을 끝도 없이 보아야 하지만 본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조르바는 행동을 통해서, 현장을 통해서, 바로 깨닫는다. 조르바는 인간 그 자체만을 본다. 초월적인 가치에 억압당하지 않는다. 휘둘리지 않는다. 조르바는 기분이 좋을 때(자신이 생각한 중요한 가치를 보스에게 이해시켰을 때)뿐만이 아니라 상대방을 말로 이해시키지 못하면 원초적인 춤을 춘다. 러시 안인을 만나서 언어를 이해 못 할 때도 춤을 춘다. 모든 사물과 교류할 수 있는 인간인 것이다. 그는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고, 과거에 한 일에 대해서 회한이나 미련을 갖지 않고, 지금 여기에 오롯이 모든 것을 집중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간다. 조르바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현세주의 삶을 산 사람이다. 현재를 즐겨라가 아닌 현재에 집중하라.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 충실할 것을 부르짖는다.


실존주의자란 단순하게 말하면 추상적이고 거창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어디까지니 삶에 대한 구체적인 태도를 지칭하는 말이다. 인류 역사에서 볼 수 없었던 세계 1차 대전을 비롯하여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을 경험한 서부 유럽의 지식인들이 계몽주의, 합리주의에 대한 지독한 회의이다. 실존주의는 먹물 냄새 풍기는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땀 냄새 물씬 풍기는 구체적인 삶을 의미한다. 조르바는 젊은 시절 조국 그리스를 위해 불가리아와 생명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뒷날 이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 인간이 그리스인인가 불가리인 인가, 착한 인간인가 악한 인간인가가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을 향한 행진곡에 이념이 무슨 의미인가?


나는 젊은 시절 동안 보수, 진보, 자본주의, 사회주의, 좌파, 우파, 종교, 정의, 평등, 복지, 젠더 등의 함몰된 인간이었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한다는 나름의 정의로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한 먹물이다. 지금까지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없으면서 뭐 잘났다고 이념을 생각했나? 나 자신이 가증스럽다. 물론 자신의 처지를 넘어선 이타적인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이 진보는 했지만... 확신 없고, 행동력이 없는 무능한 인간이, 앞으로의 세상은 이렇게 돼야 한다고 얘기했던 순간이 우습고 부끄럽다.


나는 조르바를 통하여 인간이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나 사회적 규범을 따르는 대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누가 언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르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에 동의한 적이 없는데 그것에 얽매여 노예처럼 살아야 하나? 개인의 정체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기존 질서나 사회적 규범에 살아왔던 시절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삶의 방향을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서 느끼게 된 게 행운이다. 이 모든 허깨비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이 남아있는 나의 삶의 의무이다.



Memento mori ㅡ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Carpe Diem ㅡ현재에 집중하라.

Amor fati ㅡ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너의 운명을 사랑하며 언제 죽을지 모르니 이 순간을 즐기며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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