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왜 바보들의 시대가 되었는가?'

by 김영
Kx51OCYzo7j


시작하는 말


학창 시절에 고교생의 필독서(?)로 읽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누가? 왜? 필독서로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까만 건 글자요 흰 것은 여백이었던 기억 때문에 쉽게 설명된 책을 구입해서 다시 시도하였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지만 이해되는 부분도 더러 있었다. 니체의 말마따나 '위대한 경멸의 시간'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새롭게 이해된 부분이 많아 기록하다 보니 글이 많이 길어졌다. 지루하신 분은 목차만 보시거나 처음 부분이나 끝나는 부분만 읽으셔도 될 거 같다. 참고로 이 글은 이수영, 백승형, 이진우 교수님들의 글을 참조하였다.



니체 철학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모든 가치의 전도'이다. '망치'를 들고 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가치의 가치를 따져 보는 이론적 작업이면서 동시에 무가치한 것들을 과감히 파괴하는 실천적 작업이다. 그는 기존에 가치롭다고 인정되던 모든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의 시선을 던진다. 그래서 니체를 대할 때면 당혹스러울 때가 많다. 자유, 평등, 신, 우상, 정의, 연민, 국가, 문화, 예술 등 우리가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들마저 그 근저에서 무가치함을 폭로당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는 '도덕'이 만인에게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지키는 도덕을 다른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어디 도덕이겠는가. 그런데 니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인을 위한 도덕? 그런 도덕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나쁜 도덕이며, 그런 도덕을 하루라도 빨리 파괴하지 않으면 인간의 건강에 치명적일 것이라고 경고한다. 얼마나 당혹스러운 말인가? 그러나 니체를 만나는 기쁨 중에 하나가 이런 당혹스러움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번도 의문에 부쳐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는 능력, 이것이 니체의 능력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제들은 너무나 많아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 다채로운 주제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면 아마 '삶'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삶을 건강하게 사는 법, 삶을 긍정하는 법, 삶을 경쾌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렇다고 삶에 대해 달콤한 말을 해 주지는 않는다. 가차 없이 망치를 휘두르는 것이 니체의 사랑법이다.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고자 한다면 대리석에 애정 어린 망치질을 해야 하듯이 삶을 사랑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망치를 들고 삶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파괴해야 한다. 파괴의 망치질과 함께 하는 것이 삶에 대한 사랑법이라는 게 니체의 사랑법이다.



'모든 가치의 전도'는 하나의 척도와 진리만이 지배하던 세상을 근본적으로 뒤흔들면서 수많은 진리의 경합과 투쟁이 일어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을 열기 위한 철학적 작업이다. 니체를 만날 때 어지러움과 용기를 동시에 경험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가 우리 삶의 근본적인 기초를 공격할 때는 이러다 삶의 근거마저 무너지는 것 아닌가 하는 아찔한 어지러움이 엄습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를 가두던 획일적인 척도가 사라지면서 어떤 삶의 모험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자유의 용기가 충전되는 것이다. 모든 가치를 전도시킨다는 니체의 작업은 관념의 산물이 아니다. 니체 스스로 독일의 정치문화적 상황과 대결하면서 수많은 철학적 선배, 동료들과 씨름해 가면서 몸소 만들어 낸 살아있는 경험의 산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니체를 만날 때면 다른 철학과 달리 삶이 뛰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니체만큼 삶을 이야기하는 철학자가 또 어디에 있을까? 직접 몸으로 살아가면서 만들어 낸 철학이기에 그의 철학에는 수많은 변신의 흔적이 가득하다. 변신한다는 것은 히스테리 환자처럼 발작적으로 이런 성격이었다가 저런 성격이 되는 그런 가면 쓰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니체의 변신은 성격의 대체가 아니라 높아지고 깊어지는 과정이다. 인간의 최종적인 자기 극복을 '초인'이라고 한다면 니체야말로 초인의 과정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니체 철학의 배경

「유럽의 다른 나라와 달리 아직 근대적인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 독일은 1848년 시민혁명이 발발하지만 나약한 시민계급의 배반으로 실패한다. 이에 따라 독일은 민주적 정치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암울한 염세적 분위기에 휩싸인다. 이런 상황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 인기를 끈다. 이처럼 아래로부터의 통일 운동이 실패하자 이번에는 프로이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위로부터의 운동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 치른 전쟁에서 승리를 얻고 이를 통해 근대적 통일국가를 이룸으로써 자신감이 상승하게 된다. 군사 정치적 승리감, 경제적 부의 증가, 문화적 자신감 등이 더해진 이 시기에 니체는 그런 상황이 결코 인간의 성장에 적절한 조건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참된 교양은 사라지고 저널리즘적 교양이 횡행하고 예술은 하나의 유희와 오락이 되었다. 그런데도 독일인들은 자신의 문화가 얼마나 천박한지 알지 못하고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는 사실에 니체는 절망한다. 이런 절망감에서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적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예술을 통해 현재의 문화 상황을 구원할 수 있다는 바그너의 음악론을 결합시켜 '비극의 탄생'을 썼다. 이 책은 실상 독일 통일과 군사적 강국이라는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을 핵심으로 한다. 니체에게 그리스 비극과 같은 예술은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최고의 형식이었다. 삶이란 맹목적인 의지의 충돌이기 때문에 고뇌와 비극을 연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이런 염세주의에도 불구하고 삶을 명랑하게 살았다는 것, 그리고 이는 삶의 바탕에 놓여있는 의지를 받아들일 줄 알았던 강인함에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충돌이라는 생의 고뇌에서 벗어나고자 의지의 체념과 금욕, 해탈의 관조를 주장하면서 나약한 본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리고 바그너도 독일의 문화를 개조하고 위대한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비극적 예술을 창조했던 초기의 경향에서 벗어나 기독교적인 구원이나 내세에의 동경을 표현했다. 이에 니체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들의 본성을 발견했다. 그들의 염세주의는 병들고 허약한 염세주의, 다시 말해 이 세상이 고통스러우니 또 다른 세상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낭만적 염세주의에 불과하다. 하지만 니체는 낭만적 염세주의가 아니라 '디오니우스적 염세주의'였다. 고통 속에서도 유희할 줄 아는 명랑성이다. 이것이 니체가 발견한 디오니소스이다. 너무 충만하고 풍요롭고 건강하기에 그 어떤 것도 부정할 줄 모르는 최고의 긍정 형식이 디오니소스라는 상징이다. 삶의 모든 의문스럽고 낯설고 공포스러운 것들과 당당히 맞서길 원하는 용기, 삶의 모든 가혹한 고통과 악함에 대해서도 회피하지 않고 알고자 하는 지적인 욕구. 따라서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는 허약한 본능에서 나올 수 없다. 쇼펜하우어나 바그너가 허약한 본능에서 삶의 염증을 느끼고 낭만적인 이상주의로 도피했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그들이 기독교적인 도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는 이 삶에서 도피하지 않는다. 삶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디오니소스적 의지를 가진 사람들일 것이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간절한 사랑, 그리하여 디오니소스를 말살하는 근대의 모든 도덕과 철학과 예술과 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전쟁, 이것이 니체 철학의 배경이다.」



어떻게 '도덕'을 극복하고 '초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


1. 차라투스트라, 초인을 설파하다


(1) 인간과 초인의 차이, 인간 극복의 방법



나 너희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차라투스트라의 첫 외침은 인간의 운명이란 초인이 되는 것에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핵심 주제이다. '초인'을 알면 이 책을 아는 것이고, 동시에 니체 철학의 핵심을 간파하는 것이다. '초인'은 인간이 자기 극복의 과정 속에서 완성하는 새로운 인간형을 의미한다. 초인을 독일어로는 위버멘쉬(Übermensch)라 한다. '위버멘쉬'는 '인간을 넘어섬' 혹은 '인간 너머의 것 되기' 정도의 뜻이다.


'초인'은 '자신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인간'이다. 차라투스트라가 말한 대로 "인간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넘어섰다고 해서, 다시 말해 인간이 자신의 인간성을 극복했다고 해서 초인이 인간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초인은 남을 이겨서 되는 것이 아니다. 초인은 목표가 아니라 상태이다. 시기심으로 다른 사람을 제거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다.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극복이 아니라 자기의 몰락을 소원하는 것이 극복이다. 내가 위대한 경멸의 시간을 가지고 나를 몰락시켜야 위대한 내가 된다. 나의 위대함은 타인이 아니라 내부에서 만들어야 한다. 진보는 어제의 나보다 나아지는 것이지 남보다 나아지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나는 게으름을 피웠는데 오늘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내가 나를 극복할 때마다 초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육사의 '광야'에 나오는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의 초인이 아니라, 하루하루 나아지고 있는 내가 지금 바로 초인이다.


누가 먼저 갔던 길을 따라가라는 것이 아니다. 나의 위대함에 이르는 나만의 길을 가야 한다. 매일 바꿔지면 매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새로운 존재가 되면서 매일매일 초인이 되고, 매일매일 변신하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내가 저 위대한 초인이 되고자 나의 몰락을 바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현존을 위대하게 경멸하면서 나의 위대함을 타인이 아니라 나의 내부에서 만들어 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극복은 타인의 극복이 아니라 나의 극복이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몰락을 소망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초인은 어떻게, 그리고 언제 탄생하는가? 답은 명쾌하다. 내가 극복할 때마다 나는 초인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니, 초인은 먼 미래에 나에게 갑작스럽게 도래하는 존재가 아니다. 미래는 갑자기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인간은 초인과 짐승 사이에 놓인 밧줄,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 건너편으로 가는 것도 어렵고, 되돌아보는 것도 어렵고, 멈쳐서는 것도 어렵다.

다른 존재가 되려면 죽을 수 있어야 한다.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본성의 변화를 겪는 죽음을 만들어 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죽음과 삶을 반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묶여 있으려는 관성을 강하게 갖고 있다. 우리가 다른 것을 경험하고, 다른 것을 느끼고, 다른 것을 사유할 수 있으려면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어야 한다. 변신을 하려면 늘 자신의 몰락과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초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변신의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라. 수많은 존재로 변신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이 얼마나 클지. 내가 매일 위대해질 수 있다면 굳이 남의 재능을 시기하고 미워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죽음은 완성을 가져오고, 초인이라는 미래를 낳는다. 그러니 죽음이 곧 축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부활은 죽음이 있는 곳에만 있기 마련이다.


(2) 초인이 되기 위한 정신의 세 단계 변화


차라투스트라는 초인의 정신을 갖는 법을 세 단계의 변화로 설명한다. '낙타'의 정신에서 '사자'의 정신으로, 마지막으로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가야 초인이 된다고 하였다.


◆ 사막으로 달려 나가는 '낙타'


삶은 고난의 사막이다. 이 사막을 헤쳐 갈 강인함이 없다면 삶이 전해 주는 위대한 지혜도 얻을 수 없다. 고통의 깊이만큼 지혜의 높이가 자라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 메고 뜨거운 사막을 뚜벅뚜벅 걸어 갸야 한다. 짊을 싣고 회피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삶을 증오하고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짐을 짊어지고 떠나는 것이다. 삶이라는 사막으로.


◆ 명령하는 용과 일전을 벌이는 '사자'


사막에 도착했으면 이제 근사한 싸움을 벌여야 한다. 낙타는 짐깨나 지는 데서는 선수지만 싸움의 방법은 잘 모르는 동물이다. 그러므로 사자가 되어야 한다.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하는 정신의 상징이다. 사자는 이 사막의 주인인 용과 일전을 벌이는 정신이며, 자유의 정신이다. 용은 우리에게 시키는 일만 하라고 명령하는 금지의 신이자 주인이다. 그는 한마디로 '도덕이자 법'이다. 학생은 학생답게, 노동자는 노동자답게, 군인은 군인답게 행동하라고 명령한다. 학생이면서 예술가이고자 하는 사람, 노동자이면서 철학자이고자 하는 사람을 용은 용납하지 않는다. 우리가 초인이 되려면 용의 규범과 가치를 파괴해야 한다. 그래서 사자는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고자 하는 싸움의 정신이다.


◆ 거룩한 긍정의 '어린아이'


이제 마지막 정신의 변화가 남았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를 억압하고 절대적으로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의무에 대해 경건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자도 못 하는 일이 있다. 반면 어린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새로운 가치의 창조"다. 주인에게 복종해야 하는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선 주인에게서 해방되어야 한다. 사자는 이렇게 "새로운 가치의 정립을 위한 권리 쟁취"에서 위대한 일을 해냈다. 그러나 노예에서 해방되었다고 바로 주인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새로운 가치가 발명되지 않으면 해방된 노예라도 예전의 노예 습성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것이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자. 그의 눈에 어찌 추악하고 부정한 것이 들어오겠는가? 그런 점에서 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놀이'하는 정신이다. 아이처럼 빨리 망각하는 존재도 없다.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아직도 노예이지만, 재빨리 망각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자는 "거룩한 긍정"의 아이다. 아이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다. 아이는 명령에 따르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모든 대상을 놀이로 여기고, 모든 일을 스스로의 의지와 욕망으로 하며, 늘 새롭게 시작하는 존재다. 망각의 능력과 긍정의 능력, 주인의 능력을 갖춘다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그는 아이의 본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의 삶을 배워야 한다. 그 길이 초인의 길이다.


2. 신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1) 신의 발명자들


"신은 죽었다"처럼 유명한 니체의 말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신은 죽었을까? 신의 왕국이었던 중세가 저물고 신앙 대신 인간의 이성에서 모든 근거를 발견하는 근대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시대라 할 것이다. 우리는 창조론보다는 빅뱅이론을 믿고, 기적보다는 과학적 근거를 믿는다. 그렇다면 신은 죽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과연 그럴까?


신의 죽음을 외치는 광인 이야기가 있다.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 들고 시장에서 신을 찾고 있다고 외치는 광인이 있었다. 그 시장에는 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도대체 신이 어디로 갔기에 찾고 있느냐고 조롱한다. 그러자 광인이 말한다. 바로 우리가 신을 죽였어! 우리가 살인자야! 이제 신이 없어진 거야. 그런데 당신들은 신 없이도 살 수 있겠어? 우리 존재의 모든 근거이자 위로의 원천이었던 신이 죽었는데 당신들은 어디서 위안을 얻지? 위안 없는 삶이 얼마 난 괴롭고 쓸쓸한지 잘 알잖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위안을 찾을 수 없다면 신의 위안 없이 사는 방법도 있지 않을까? 바로 우리가 신처럼 위대해지면 되지 않겠어? 광인의 말은 사람들이 아직도 신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모른다는 질책이다. 그들은 신을 믿고 있지는 않지만 삶이 불안해지면 언제든 신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내면에는 "우상을 모시는 저 늙은 사제가 아직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신이 죽었다고 완전히 죽은 것도 아니다. 신의 죽음이 완전해지려면 인간이 신처럼 위대해져야 한다. 인간이 위대하다면 굳이 신을 믿고 따를 이유가 없어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신을 만들어 냈을까? 아니 인간은 언제 신이 필요할까? 가끔 우리가 신을 갈구할 때가 있다. 눈앞이 깜깜할 정도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는 신을 찾는다. 매우 큰일을 당했거나 몹시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을 때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우리는 신에게 기도한다. 이처럼 우리가 신을 찾을 때는 우리의 허약한 삶이 난관에 부딪칠 때다. 교회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사람도 위급하면 신을 찾는다.


니체는 신을 찾는 자들의 생리적 상태를 '피로감'에 있다고 본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육체적으로 피로하면 노력하기보다 쉬고 싶어지는 법이고, 정신적으로 피로하면 더 치밀하게 생각하기보다 대충 결론을 내고 싶어지는 법이다. 이렇게 불행한 상황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을 때 신을 날조하게 된다. 신이 약속하는 저 낙원으로 가기만 하면 이 지상의 고통과 불행은 더 이상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안심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도약"이다. 건강한 사람은 에베레스트산처럼 높은 산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그 산을 정복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하고 실패를 거듭한다. 그리고, 결국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가 병든 자들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이 세상을 떠나 행복의 나라로 가려고 한다.


우리 중에 많은 사람들은 세상살이가 고통스러운데 개선할 수도 없을 때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날 거야'라는 덧없는 망상을 한다. 신을 찾는 사람들은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삶 속에서 지금은 이렇게 살지만 죽으면 저세상에서 신이 나를 구원해 줄 거야 하는 망상을 한다. 불행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신을 만들어 냈다. 막시즘으로 표현하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그런데, 허망하고 덧없는 삶에 왜 집착하는가? 지금, 여기의 삶을 저주하고 부정한다면 차라리 살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이 땅이 저주의 땅이라면 축복받은 땅으로 지금 당장 가 버리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아직 저들은 이 세계를 등진 적이 없다. 그것은 이 땅에 대한 작은 미련이 있고 이 삶을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현재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내세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세를 말하는 종교인들은 간교한 게으름뱅이 이거나 훔쳐먹기를 좋아하는 쾌락의 고양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오랜 세월 신은 인간의 선악을 규정하는 절대명령이었다. 선악 그 자체는 고정불변의 것으로 여겨졌고, 그에 반하는 인식은 용납되지 않았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도덕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조건하에 주어진 하나의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주인 노릇을 하면서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니체는 그 전도된 관계를 역전시키면서 모든 가치의 전환을 시도한다. 니체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나약했기에 절대권자인 신을 창조해냈고, 더 이상 그것을 믿지 않았기에 신을 죽인 것 또한 인간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의 죽음은 단순히 기독교적인 의미의 유일신이 아니라, 인간적 형태의 온갖 우상 숭배의 종식을 뜻한다.


(2) 국가라는 새로운 우상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어 죽어 가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자기 자신을 상실하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신을 대체한 국가ㅡ더 이상 신을 믿지 않는 자들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국가다. 국가,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우상이다. 국가가 개인의 완성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개인이 국가 발전의 도구와 수단이 되어야 한다. 현재도 우리 욕망의 척도를 지배하는 것은 국가다.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이 희생해야 하고, 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개인의 정당한 권리도 제한되어야 한다. 사상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국가적인 인간이라는 무서운 딱지를 붙인다. 국가는 고분고분 순종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국가를 넘어서는 위대한 창조력을 바라지 않는다.


신에게 복종하는 자들이 허약하고 병든 자들이었듯이 국가에 복종하는 자들도 절대 고귀한 자가 될 수 없다. 뭔가를 숭배한다는 사실 자체가 벌써 노예로 살고 있다는 뜻이다. 국가는 노예적 삶을 원하지 주인의 삶을 원하지 않는다. 신의 도덕성 앞에서 인간 모두가 아담의 원죄를 짊어진 타락한 인간이 되듯이 선진국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 우리 모두는 기계의 나사처럼 소모되어야 한다.


국가는 선과 악이라는 말을 다 동원해 가며 사람들을 기만한다. 국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리고 국가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은 그가 부당하게 취득한 장물에 불과하다. 이런 국가가 무너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될 때 초인에 이르는 다리가 보일 것이고, 그 다리 위에 아름다운 무지개가 뜰 것이다. 국가 없이 어떻게 살지? 그런 두려움에 떨 필요가 없다. 초인을 향한 "위대한 동경"은 그런 두려움도 극복하게 해 준다. 우리가 초인이라는 아름다운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 도대체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우리는 조국에 대한 사랑보다 초인이라는 우리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동경에 힘써야 한다. 안전하지만 죽음이 약속된 국가의 삶보다 위험하지만 생이 약속된 초인의 나라로 떠나 보자.


(3) 숭배를 금지하라


신을 위해 피를 흘리며 순교한 사제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한 게 아니라 자신의 믿음만을 증명했을 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자신의 믿음만을. 그리고 신의 말씀이 진리라는 자신의 믿음을. 그런데도 사람들은 누군가 피를 흘릴 때 거기에 어떤 진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피 앞에 열광하는 광신도들은 진리를 찾기보다는 그런 열광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정신이 들뜨고 영혼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을 좋아할 뿐이다. 진리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검증의 문제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순교는 검증보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한다. 신앙을 요구할 뿐 회의적 검증과 실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으면 복을 받는다."그런데 아직 복을 받지 않았다면 믿음이 부족한 것이니 자신의 믿음을 반성하라고 요구한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초인이 등장하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것이 언젠가 우리가 위대한 정오를 맞이하여 갖게 될 최후의 의지가 되기를.



그런데 아직 모든 신은 죽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모든 신의 죽음을 완성할 때 우리는 초인의 등장을 바랄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한다. 그림자가 길어져 우상의 형상이 거대하게 보이는 황혼의 시간을 싫어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신이든 국가든 뭔가를 숭배한다는 것은 숭배하는 자를 비참하게 만든다. 우리는 고양되어야 할 존재이지 비천해질 존재가 아니다.


벗을 원한다면 그 벗을 위해 기꺼이 전쟁을 벌일 각오라도 해야 한다

전쟁은 서로를 죽여 없애는 말살의 전쟁이 아니라 벗이 나를 통해 자기를 극복하도록, 그리고 그 극복하는 벗의 자극을 통해 나도 극복되도록 서로 고무하는 전쟁이다. 그러므로 우정은 서로를 고양시키는 선물의 관계이다.


3. 인간의 도덕을 전복하라



거짓 가치에 현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창조, 그것은 고통에서의 위대한 구제이며 삶을 경쾌하게 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창조하는 자가 존재하려면 고통이 있어야 하며 많이 변신해야 한다.

도덕은 변한다


신을 숭배하고 국가를 섬기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인간의 억압술이 바로 도덕이다. 도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뛰어넘기보다는 신과 국가에 복종하기를 요구한다. 인간이 왜소해지는 삶의 방식이 바로 도덕에 굴종하는 삶이다. 그렇다고 도덕이 불변의 원칙인 것은 아니다. 도덕의 기준은 나라마다 다르고 시대 마자 달라진다.


그렇다면 도덕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 선과 악은 무엇인가? 인간이 존재할 때부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그런 것인가? 아니다. 각각의 민족은 나름대로 고난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니 그 민족이 가장 힘들게 극복한 것, 그리하여 가장 가치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도덕은 무조건 지켜야 하는 신적인 원리나 가치가 아니라 그 만족이 살아가면서 부여한 가치 평가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이렇게 가치를 평가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개인적인 가치 평가들이 모여 그 시대, 그 민족의 도덕이 된다. 그리고 그 가치도 변할 수밖에 없다.


평등에서 불평등으로


차라투스트라의 설교는 놀랍다. 인간이 평등해서는 안 된다니! 평등의 문제를 두 측면에서 생각해 보자. 우선 우리 자신의 경우, 내가 과거의 나와 동일하다면(혹은 평등하다면) 나는 아무런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한 내지 못한 인간일 것이다. 변화 없는 인간, 그래서 늘 똑같은 인간처럼 단조롭고 무의미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에게조차 평등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나에게 전투를 걸고 싸워야 한다. 이렇게 나를 극복할 때 과거와 나와는 다른 새로운 나, 그리고 더 위대해진 나를 창조할 수 있다. 내 안의 '불평등', 이것이 바로 자기 극복이자 초인의 길이다.


두 번째, 나와 타인의 평등을 생각해 보자. 인간의 평등은 정말 좋은 것일까? 물론 흑인과 백인은 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인종적 평등이 지혜의 평등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평등의 개념이 확장되어 고귀한 것이 비천한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인식이 형성되는 사태이다. 지혜가 많은 자는 지혜가 부족한 자와 평등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이 평등해진다면 인간은 지혜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테고, 그럴 때 인간은 동물적인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불평등이 있어야 하고, 지혜가 부족한 자의 자기 극복과 전투가 있어야 한다.


평화보다 전쟁


우리는 자신과 싸워야 하고, 동시에 타인과 싸워야 한다. 좋은 전쟁은 서로의 고양을 가능하게 하는 전쟁이다. 사유의 싸움, 곧 삶의 싸움은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 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 그 싸움을 통해 내 사유의 허점과 빈약한 지점을 알게 되는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면 내 사유가 패배했다고 해서 꼭 실패한 싸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싸움이든 비록 졌다고 하더라도 승리하게 만드는 비법이 있는데, 그것은 전쟁에서 내가 전보다 더 고양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벗만이 아니라 훌륭한 적도 사랑해야 한다. 적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므로.


그러했다


"그랬었지"는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원한이다. 이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만연할 때 인간은 생을 징벌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다시 돌이킬 수도 없는 그런 고통의 과거, 쌓여만 가는 현재의 고통, 그래서 생은 곧 인간에겐 징벌이 되고 만다. 과거의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게 인간의 조건이라면 인간이란 곧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생존 또한 영원히 되풀이해서 행위가 되고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것을 창조적 의지라고 말하고, 지난날을 구원하고 일체의 "그랬었다"를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로 전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초인이 되는 마지막 단계인 '아이'의 정신에 도달하면 된다. 아이는 끊임없이 창조하고, 긍정하고, 망각한다. 아이는 '과거에 그러했다'라는 원한을 모른다.


이웃 사랑의 위선


"이웃을 사랑하라!"갈수록 개인의 이익과 행복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웃 사랑은 현대의 병폐를 치료하는 최고의 덕목으로 칭송되고 있다.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만이 개인주의의 폐쇄된 감옥과 개인주의적 이익 추구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치유할 수 있다고 한다. 이웃을 사랑하면 선행을 베풀기 전의 우리보다 더 고귀해진 우리를 느끼게 된다. 결국 이웃 사랑이 이웃에 대한 헌신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 만족감과 우월감을 형성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이웃 사랑으로 달려가는 것이 오히려 쉽다. 이웃의 불행을 같이 슬퍼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웃 사랑을 통해서만 자신을 사랑하려는 것은 올바른 길이 아니다. 따라서 이웃 사랑에 대한 도덕적 과대평가는 자기애의 결핍을 만회하기 위한 위장술이라 볼 수도 있다. 이웃 사랑의 기쁨이 클수록 자기 상실의 가능성도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초인의 철학은 자기애의 철학이다. 자기를 사랑할 수 없는 자, 그는 절대로 초인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


중력의 악령을 넘어


"중력의 악령"은 한 마디로 하면 '도덕'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도덕의 가르침을 배운다. 선과 악은 보편적이라 무조건 따라야 한다고 도덕은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발생한다. 만인이 '선'이라 부르는 것을 따르는 일이 과연 나에게도 '선'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의 건강에 좋은 약이 내게도 좋은 약이라 할 수 있을까? 수많은 건강이 있듯이 도덕에도 수많은 길이 있을 수 있다. 보편적인 도덕은 나의 도덕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저 중력의 악령은 그런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저 따르기를 강요한다. 중력의 악령에 붙들리면 자신만의 도덕의 세계를 만들 수 없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삶은 원래 힘든 것이다. 그러나 힘든 만큼 모험하고 탐색하는 기쁨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런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이 모두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는 도덕이라는 중력의 악령이다. 중력의 힘과 같이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는 도덕. 모든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도덕, 인간의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지 못하게 구속하는 도덕, 그것이 바로 난쟁이의 형상을 하고 있는 중력의 악령이 갖는 의미이다. 동력의 악령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일, 이것이 바로 자기 사랑의 방법이다. 중력의 난쟁이를 침묵시키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만천하에 고하면서 "이것이 나의 선이고 악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인간은 비로소 도덕의 인력에서 자유로워져 가볍게 날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과거의 영혼과 작별하는 슬픔을 감수하고, 매번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 이것이 차라투스트라의 길이다.


노예의 도덕에서 주인의 도덕으로


명령할 수 있는 주인도 민중의 욕망을 살피고, 섬겨야 하는 민중도 주인의 욕망을 살핀다. 그런 점에서 모두 노예이자 하인이다. 명령할 수 있는 자의 상실, 이것이 왜소한 덕의 특징이다. 신 앞에 평등하지만 이들은 신의 노예로서만 평등하다. 법 앞에 평등하니 법의 명령에만 따를 뿐 그 법을 넘어서는 삶을 꿈꾸거나 명령하지 못한다. 자기 삶을 극복하고 창조해 본 경험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삶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원할 줄 아는 자도 될 수 없다. 남의 욕망에 끌려다니는 하인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나오는 욕망을 생성할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4. 힘에의 의지(권력에의 의지)


세계가 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습다.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는 다르다. 세계는 보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그러므로 신의 말씀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생각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그렇다고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가 동등하다는 것도 아니다. 니체에게 있어서 생명 그 자체는 권력에의 의지다. 권력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본적인 현상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권력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을 말한다. 욕망, 충동, 생존 등 삶의 의지는 모두 내면으로부터 발현되는 힘이며, 이것을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한다. 또 권력은 무언가를 일어나게 하는 힘이다. 이제까지 자기가 성취한 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의지, 그것이 권력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욕망은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생긴 게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런 권력의지를 갖고 있다. 생명의 핵심이 권력의지에 있다면, 이 권력의지를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위험'이다. 위험은 권력의지의 본성에 속한다. 위험은 어떤 나쁜 생각을 갖고 있는 악한이 초래하는 게 아니라 삶에 내재한다. 사유의 세계를 살펴보자, 사유의 혁신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것은 물론 어떤 천재적인 사상가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면 이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유 가능한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인 권력의지에서 비롯된다. 천동설로는 해명되지 않는 몇 가지 천체 현상을 지동설은 너끈히 설명한다. 천체 현상에 대한 이해는 천체에 대한 인간 정신의 지배를 뜻한다.


힘에의 의지는 상승적 삶에의 의지, 생명 의지, 자기 극복의 의지이다. 자신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게 하고자 하는 힘이며 자기를 완성하고, 세계를 완성해가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5. 영원회귀


영원회귀는 영원히 반복되는, 동일한 것의 반복을 뜻한다. 의미나 목표도 없는, 그렇지만 피할 수 없이 회귀하는 그대로의 실존,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이다. 이는 내가 하고 있는 특정 행위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의미이며, 우리의 삶 또한 과거에 무수히 반복되었던 삶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핵심이다. 우리가 만약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면 즐거운 삶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요, 이 순간을 부정적으로 살고 있다면 부정적인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영원회귀는 내세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여 천국을 추방해버린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말고는 다른 세상은 없다는 것이다. 나의 현재 삶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들은 영원회귀를 저주한 반면, 삶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이야기보다 신선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다. 현재 괴로움의 원인으로 과거를 보지 말고 이 순간은 과거 미래가 접점이 되어 있으니ㅡ이 순간은 우리가 아는 과거와 우리가 모르는 과거가 다 존재하니ㅡ그 과거를 잘 소화해 내면 이 과거는 나를 새롭게 만드는 주춧돌이 되어서 새롭게 나를 변화시킨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과거는 새롭게 구성된다. 지금 이 순간에 결단을 내리면 과거는 또 바뀌는 것, 지금이 중요한 것이다. 이 삶을 영원히 반복해야 한다고 해도 "그래 좋다, 다시 한번!"이라고 말하는 자는 삶을 사랑하기 위해 매번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 사람들이다. 영원회귀를 한마디로 말하면 현실은 과거와 미래를 응축한 것이니 지금의 현실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맺는말


서른 살에 고향을 떠나 산에서 십 년 동안 은둔한 체 명상을 즐겼던 차라투스트라는 심경의 변화를 느껴 산 아래로 내려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고 '초인'을 설파한다. 이 책의 핵심 내용은 '초인',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사상이다. 니체는 기존의 철학이나 가치, 사유를 뒤엎어버렸다. 신은 죽었고 인간은 왜소한 존재이고 역겨운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초인'으로 계속 극복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신은 서양 사상을 지배해온 '플라톤주의'이다. 이를 극복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초인'이 된다. 신을 대신한 것이 현대에서는 국가이다. 국가가 원하는 것은 순종적인 노예를 원한다. 인간은 신이나 국가, 도덕의 종속물이 아니다. 내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지금의 현실을 치열하게 긍정하고 부딪치며 살아야 한다.



니체 ㅡ망치를 든 철학자


1. 근대성을 떨쳐버리고 현대성과 현대정신으로의 전환점.


2. 철학의 플라톤주의를 전복한 철학적 다이너마이트.


3. 서양의 전통 자명성 일체를 파괴하는 망치의 철학자.


: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 의미와 필연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철학)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