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의 집 "꿈의 궁전"

여왕을 꿈꾸던 소녀들께 묻습니다.

by 영차보

얼마 전, 남편, 아이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던 중이었다. 한적한 국도를 달리는데 차창 밖으로 낡고 촌스러운 건물의 간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초록색 조명과 붉은 글자에 허름함이 감도는 모텔 간판이었다. 남편은 무심하게 앞을 보고 있었고, 뒷자리의 아이는 창밖엔 관심이 없었다. 오직 나 혼자 그 간판에 적힌 이름을 보며 3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은 어른들의 은밀한 장소가 되어버린 그 이름. 하지만 30년 전, 나의 전부였던 그 골목에도 분명 존재했던 이름.


[꿈의 궁전]


무슨 내용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때 제법 유명했던 드라마 제목을 딴 그 이름은, 다섯 평도 되지 않는 작은 선물가게 상호치고는 다소 거창했다. 하지만 어린 나에게 그곳은 모텔도, 드라마 세트장도 아닌 진짜 여왕님이 사는 궁전이었다.


타일 박스가 쌓여있는 우리 가게나, 페인트 냄새가 진동하는 페인트 가게, 담배 연기가 자욱한 책방과는 차원이 달랐다. 유리 진열장 안에는 보석이 박힌 머리핀과 아기자기한 장식용 인형, 향수와 화장품 등이 가득했다. 나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떠올려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물건들과 알록달록한 조화들이 가득 찬 동네 잡화점이었지만, 우리 동네 선물의 집 ‘꿈의 궁전’은 정말이지 궁전 같았다. 특히 그곳을 진짜 궁전처럼 만든 건, 카운터에 서 있던 ‘꿈의 궁전 이모’였다.


꿈의 궁전을 지키던 이모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전대를 차고 가게를 지키던, 전투적인 골목의 흔한 엄마들과는 달랐다.


그녀는 뽀글거리는 파마머리 대신 S.E.S의 바다처럼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굵고 우아한 웨이브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는 붉은 루주 대신 옅은 립글로스가 반짝였고, 언제나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나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우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나에게 충격인 동시에 동경이었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다. 우아한 옷을 입고, 좋은 향기가 나고, 머리는 항상 잘 정돈되어 있으며, 입술이 반짝거리는 그런 어른 말이다.


그리고 강산이 세 번은 족히 변한 지금. 거울 속의 나는 어린 나에게 멋쩍은 웃음을 짓고 서 있을 뿐이다.


레이스 원피스는 따가워서 못 입는 어른, 무릎이 툭 튀어나온 극세사 수면바지가 유니폼인 어른, 바쁜 아침에 겨우 세수만 하고 나가는 어른, 우아한 웨이브 대신 똥머리로 대충 묶어 올린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역시 난 예쁜 아줌마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속상하진 않다. 이젠 삶을 사탕처럼 할짝거리던 시기를 지나,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사십 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역시 마찬가지다. 보이는 것, 화려한 것, 생활의 때가 묻지 않은 것을 동경했던 시기는 지났다. 이제 나는 아름다운 사람이기보다,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


비록 ‘꿈의 궁전’ 속 여왕님은 되지 못했지만, 내 방구석에서 수면바지를 입고 키보드를 두들기는 나의 삶이 몹시도 사랑스럽다. 무엇보다 수면바지는 참 따뜻하니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 시절 ‘꿈의 궁전’ 앞을 서성이며 “난 엄마처럼 안 살아!”를 외쳤던, 나와 같은 시대를 건너온 소녀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다들 우아한 여왕님이 되셨나요? 아니면 나처럼 수면바지의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나요? 오늘은 어떠셨나요? 마흔이 된 삶 속에서 씩씩하게 웃고들 계신가요?


어디에 계시든, 그곳이 진짜 꿈의 궁전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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