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꿈 사이에서 다시 찾은 열정

아직 설명할 언어가 없다

by 영초이

회사에서의 인정


그날은 특별한 일정이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 주간 회의도 끝났고 남은 건 각자 자리로 돌아가서 하던 일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습관처럼 담배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팀장이 내 자리로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손에는 출력된 자료 몇 장이 들려 있었다.


"잠깐 시간 괜찮아요?"


나는 담배를 억지로 주머니에 쑤셔 넣고 몸을 돌렸다.


"네."


그는 내 자리 옆에 바짝와서 얘기를 시작했다. 그 자체로 이미 조금 이례적이었다. 그는 자료를 테이블 위에 펼치며 말했다.


"이번에 위에서 이 안건을 꽤 자세히 보더라고요."


자료는 내가 지난주에 정리해 올린 내용이었다. 평소처럼 요청받아서 정리한 보고서였고 조금 신경 쓰긴 했지만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중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정리 방식이 좋았다고요. 기술 얘기인데도 판단 근거가 명확하다고."


칭찬치고는 담담한 말이었지만 나는 바로 알았다. 이건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잘했다는 쪽에 가까운 평가였다. 애초에 팀장은 이렇게 따로 자리에 앉아서 칭찬을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이런 건 맡아서 봐주면 좋겠어요. 최 박사가 봐주면 이쪽 일 방향 잡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순간, 머릿속에서 계산이 빠르게 돌아갔다. 이건 업무 분장이 아니었다. 책임을 하나 더 얹는 말이었다. 공식 직함도 보상도 변하지 않지만 회사 안에서의 위치가 아주 조금 이동하는 신호였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그럼 믿고 맡길게요."


그는 짧게 웃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실도 아니고 인사평가 자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믿고 맡긴다는 말 한마디가 그날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건 회사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가장 간단하게 요약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몇 가지가 더 바뀌었다. 팀장 메일에 참조로만 들어가던 내가 어느새 수신자로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최 박사 의견을 먼저 듣고 싶다는 라는 문장과 뉘앙스가 자연스럽게 붙었다.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질문이 오는 방향이 조금 바뀌어 있었다.


그게 회사생활에서 인정이라는 걸 모를 만큼 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인정이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 기대를 어설프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신중해졌고 더 책임감 있게 말했고 더 깊이 생각했다. 그럴수록 내 대답은 조금씩 힘이 실려갔다. 아직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는데 이미 나는 이 회사에서 선택받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문득 생각나는 만찬에서의 대화


오늘은 유난히 피곤했다. 갑자기 터진 공정 일탈로 하루 종일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문제 확인 작업으로 정신없이 회의에 자료 작성에 보내고 왔다. 집에 와서도 바로 씻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오자마자 씻었겠지만 아무렴 어때. 술 생각이 났다. 나가서 곱창에 소주를 한잔할까 하고 통화목록을 뒤적거렸지만 관두기로 했다. 대신 핸드폰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냉장고에서 차가운 맥주 한 캔을 꺼내와 소파에 다시 주저앉았다. 캔을 따자마자 반을 단숨에 벌컥벌컥 마시고 그대로 누웠다.


어두운 천장을 멍하니 보다 문득 학회장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만찬장에서 홍세진 교수와 나눴던 대화가 이상하게 또렷하게 떠올렸다. 나는 그날 이후로 몇 번이나 그 대화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회사에서의 말은 늘 명확했다. 잘하고 있다, 믿고 맡긴다, 기대한다. 그건 모두 현재의 나를 기준으로 한 평가였다. 지금까지 해온 일과 역할에 대해 나는 익숙했고 명확한 표현 안에서 안정감을 느꼈다. 그런데 학회장에서의 대화는 달랐다. 거기에는 현재형이 거의 없었다. 대신 정의되지 않은 문제와 애매모호한 질문만 있었다. 마치 지금의 나가 아니라 어쩌면 될 수도 있는 나를 보고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신경 쓰였던 것 같다. 회사에서는 나를 어디까지 맡길 수 있는 사람인가가 중요했다면, 학회장에서는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차이는 작아 보였지만 무시할 수 없었다.


다시금 오늘 아침에 벌어진 문제에 대해서 생각했다. 갑자기 왜 잘 배양되던 배양기에서 균이 검출되었던 건지 문제를 찾고 처리하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내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번 주는 내내 지긋지긋한 CAPA 작업을 진행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혁신적인 기술의 이름인 CAPA가 내 현실에서는 야근시간을 채워주는 귀찮은 일이다. 오늘 일을 생각하니 다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만 생각해야지. 반쯤 식은 맥주를 단숨에 비우고 나니 만찬에서 홍세진 교수가 마지막에 던졌던 말이 떠올랐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뉘앙스는 선명했다.


"그때 홍교수가 얘기한 말이 '설명할 언어가 없어요'랑 비슷한 말이었던 것 같은데."


기억도 나지 않은 말의 뉘앙스가 계속 남았다. 아직 설명할 언어가 없는 문제. 박사과정 때도 그런 질문들도 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 연구가 논문으로 나왔을 때, 그걸 엄마의 생일선물로 굳이 끼워 넣은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그때 엄마가 좋아하긴 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잠시 대학원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왜 지금에서야 그때 그 열정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다시 냉장고에서 맥주 세 캔을 꺼내와서 책상에 앉았다. 노트북에 두서없이 여러 단어를 써보았다.


Peptide conformational transition

Stimuli-responsive peptides in process development

Process engineering for responsive peptide self-assembly

Process robustness for dynamic biomaterials

Batch-to-batch variability in peptide self-assembly

Multi-stage activation peptides

Defining identity for dynamic biologics


한참을 검색하다 보니 어느새 가져온 맥주도 전부 마셨다. 벌써 새벽 1시였다. 알딸딸한 기분에 대충 씻고 침대에 누워보니 문득 박사 졸업식이 생각났다. 졸업식 때는 '실험실 쪽으로는 쳐다도 안 볼 거고, 막말로 오줌도 그쪽으로 안 싸'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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