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만남: 스카우트 제의

고급일식당에서의 만남은 설득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by 영초이

예고 없던 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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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진 교수의 연락은 예상보다 평범하게 왔다. 회의가 하나 끝나고 자리에 돌아왔을 때, 휴대폰 화면에 낯선 번호로 메시지 하나가 떠 있었다.

"잘 지내시죠. 잠깐 통화 가능하실까요?"


짧은 문장이었다. 용건도 긴급함도 없었다. 누구지? 전화번호를 '0000'라고 저장해 두고 카톡 친구목록을 새로고침해봤다. 새로운 친구가 떴는데 누군지 모르겠다. 이게 그 요즘 보이스피싱이나 로맨스 스캠인가 싶어 넘기려다가,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다 싶어 답장을 보냈다.

"제가 저장이 안 되어 있어서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실까요?"

"제가 누구라고 얘길 안 했군요. 홍세진 교수입니다."


아차 싶었다. 명함을 받아두고 저장을 미처 못했다. 서둘러 예의를 갖춰 답을 보냈고 5분 뒤에 통화하기로 했다. 부랴부랴 비상계단으로 가서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형식적인 안부 인사와 학회 이야기가 잠시 오갔다. 그의 말은 여전히 군더더기가 없었다. 대신 학회장에서 나눴던 그 질문을 다시 꺼냈다.


"그때 이야기했던 생산 부분 말 입니다. 요즘도 계속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대답 대신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요즘 퇴근하면 관련 논문과 특허 검색을 끼고 살고 있으니까. 잠시 정적이 흐른 뒤 그가 본론을 꺼냈다.


"다음 달이면 회사를 시작합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녁을 초대할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안부 전화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각오하고 있던 터라 대답은 생각보다 망설임 없이 나갔다.


"네, 교수님. 좋습니다."


이렇게 얼떨결에 약속이 잡혔다.




만남: 강남의 일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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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저녁, 서둘러 퇴근하고 강남의 한 일식당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거리가 좀 있어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달려갔다. 도착해 보니 이미 익숙한 이름의 가게였다.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곳으로, 예전에 여자친구와 기념일 장소를 찾다 가격표를 보고 '로또 1등 되면 가자'며 웃어넘겼던 바로 그 집이었다. 홍세진 교수님이라고 작게 써진 예약룸으로 찾아가니, 홍 교수와 처음 보는 여성 한 분이 앉아 있었다. 통성명이 오갔다. 회사의 기술 총괄을 맡게 될 CTO 정혜진 이사였다. 정혜진 이사는 교수 출신으로 이 분도 홍세진 교수 못지않은 이력을 자랑하는 연구자였다.


"먼저 식사를 하시죠."


홍 교수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었고 기다림 없이 바로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아갔다. 메뉴판은 펼쳐지지 않은 채로 몇 마디 오간 뒤 주문은 끝났다. 아마 자주 오는 곳인 모양이었다. 첫 코스로 담백한 전채요리가 나오고 대화도 자연스럽게 흘렀다. 처음 십여 분은 정말 평범했다. 날씨 이야기와 서로의 근황 정도의 가벼운 얘기를 나눴다. 회사 이야기나 연구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비켜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게 오히려 더 긴장됐다. 이 자리가 어디로 흘러갈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요리가 나오고 드디어 메인 요리가 나왔다. 접시가 바뀌면서 대화의 표정도 달라졌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술을 시킬 타이밍이기도 했다. 이제는 탐색이 아니라 방향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정혜진 이사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희가 연구는 참 자신 있는데, 생산은 사실 경험이 없네요. GMP 생산, 역시 많이 까다롭겠죠?"


정 이사가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지만,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답했다.

"까다롭다기보다 다른 세계라고 보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 연구소에서 공장으로 넘어갔을 때 정말 많이 당황했거든요. 보는 관점 자체가 다르니까요."


정 이사가 귀를 기울였다. 나는 설명을 이어갔다.

"연구실에서는 비커로 대부분 성공했던 방법이라도 공장에 들어오면 대부분 실패해요. 기억나는 건 겨우 온도가 0.5 ºC 차이가 났는데도 실패하고 다 폐기해 버렸죠. 그때, 얼마나 깨졌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맨날 문서를 매일 쓰고 고치고 해요."


정혜진 이사가 농담 섞인 말투로 얘기했고, 홍 교수는 허허 웃으며 거들었다.

"문서라면 저희도 신물 나게 써온 사람들이라 자신 있는데 말이죠"

"정혜진 교수님께서 아주 뛰어난 테크니컬 라이터시잖아요."


나는 홍 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산 문서는 잘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물론 그러시겠지만, 생산 문서는 성격이 조금 다르더라고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나 보다는 이 제품이 내일도 그리고 내년에도 똑같이 만들 수 있는가를 봐요."

"결국 문법이 아예 다르다는 말씀이시네요."

"네, 매일 똑같은 양식에 똑같은 결과가 나오게끔 쓰는 거죠."


그리고 생산에 관련한 얘기를 좀 더 나누다 회사가 개발 중인 약 대한 얘기가 나왔다. 복잡한 형태를 변화하는 단백질 약에 대해서 궁금하기도 했고, 두 사람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러다 정 이사는 언제 제품 스펙을 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왔다.

"제품의 스펙을 잡는 게 제일 고통스러운 작업입니다. 약을 만들기로 했으면 처음부터 최종 제품의 기준을 고정해야 해요. 그 뼈대가 흔들리면 그때그때 사고를 막는 땜질이 되어버리거든요."

"처음부터요?"

"네, 생산을 시작하면 제품 최종 스펙부터 정해야 해요."

"제품 스펙은 누가 정하나요? 연구책임자?"

"규제나 사용 방법에 맞게 연구와 생산, 품질, 규제 모든 팀이 모여서 정하죠. 그렇지만 최종 승인은 품질 보증팀에서 대부분 합니다."

"최종 결정을 연구팀이 아니라 공장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게, 연구자 입장에선 참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긴 하네요."

"물론 연구팀에서 좋은 연구 결과를 만들어서 제품 특성이 정해지면 그때 제대로 된 생산을 시작하죠. 연구 없으면 생산도 없어요."

"연구 파트에서는 계속 좋은 약을 만드려고 이것저것 바꿀 텐데요."

"그래서 좋은 연구결과가 중요해요. 연구 결과가 많으면 많을수록 초기 품질을 더 잘 잡을 수 있으니까요. 나중에 스펙이 바뀌어서 공정을 다시 처음부터 만들면, 결국엔 돈의 문제가 돼버립니다."


정 이사의 표정이 처음으로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영 이해가 안 간다기보다는 납득이 어렵다는 판단에 가까웠다.




스카우트 제의


이후에도 의약품 생산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그리고 회사 기술에 대해서 열띤 토론을 하는 교수와 이사 사이에서 필요한 부분에서만 의견을 보태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벌써 네 병을 다 마시고, 어느덧 다섯 병째를 시키고 있다. 술을 시키는 중에 테이블 위에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술기운 덕분인지 그 침묵이 무겁기보다는 서로의 고민을 이해하는 공백 같았다. 그때 홍 교수가 자연스럽게 내 잔을 채워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가 이 자리를 만든 겁니다. 연구와 실제 생산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사람을 계속해서 찾고 있었거든요."


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최 박사님 같은 분이 도와주신다면 정말 제대로 된 약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정 이사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제야 대화의 결을 완전히 이해했다. 이 자리는 나를 설득하려는 것보다는 서로가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확인하는 합의에 가까운 자리였다.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홍 교수는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 회사와 같이 해보는 건 어떠신가요."


그 말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기대를 실은 어조가 아니었다. 마치 선택지를 조용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놀라지도 않았고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 말이 나올 시점이 지금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미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같은 장면을 그려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덧붙였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 회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시니까."



그 말에는 배려와 동시에 나에 대한 인정이 섞여 있었다. 그래서 이 제안은 도망치듯 떠나는 탈출구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를 전제로 한 다음 단계였다.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은 건 선택의 순간이 와서가 아니라 이미 선택이 시작되었다는 걸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지금의 세계와, 이제 막 나를 선택한 새로운 세계. 두 세계가 동시에 나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 묘하게 무거웠다.


갑작스럽지도, 극적이지도 않았다. 충분히 예열된 상태에서 건네진 정중한 초대.


스카우트 제의는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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