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새로운 곳에서 노트의 첫째 장을 펴다
팀장과의 면담
그러나 퇴사 결정을 말하기까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결정을 못 해서라기보다는 말을 꺼낼 적절한 순간을 고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는 타이밍이 중요했다. 누구보다도 내 상사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적절한 순간이 왔을 때, 팀장에게 퇴사를 알렸고 팀장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단지 시간을 잡고 다시 갈 길을 갔다.
시간에 맞춰 회의실에 도착했고, 팀장이 복도 끝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걸 보았다. 회의실 문을 닫자 그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물었다. 여유 있는 발걸음과 다르게 서두르는 느낌이었다.
"어디로 가요?"
질문은 짧았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미 몇 가지 경우의 수들을 머릿속에 올려두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스타트업입니다."
그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아무래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이었던 것 같다. 그는 아무것도 안 쓰인 페이지를 펼칠 채 볼펜으로 딸깍딸깍 소리를 냈다. 속으로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분명히 보였지만, 그걸 바로 꺼내지는 않았다.
"연구 쪽? 원래 하던 일인가요?"
"네. 공정 개발 일은 계속할 듯해요. 근데 생산 쪽 업무를 주로 맡게 될 거예요."
"하긴, 최 박사가 어울리는 일이긴 하네요. 여기서도 연구실에서 만들어진 걸 GMP로 옮기는 일을 했으니까."
그는 한숨을 쉬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회사인지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맡은 건, 최 박사가 아니면 당장 이어받을 사람이 없네요."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바로 나가면 곤란한데, 퇴사 시점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 달은 시간을 줬으면 해요."
그 역시 질문이 아니라 정리된 의견에 가까웠다. 내심 퇴사 면담 전에 정리한 말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배려가 섞여 있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던 일은 최대한 깔끔하게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
"사실 이렇게 퇴사 얘기를 하지만요. 솔직하게 아쉽긴 합니다."
"회사에서도 꽤 능력 있던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나간다고 하니..."
칭찬처럼 들리지 않게 그렇다고 형식적으로도 들리지 않게 말하는 방식이었다. 이 사람 나름의 인정이었다. 그 후로 소소한 얘기를 나누면서 5 분 가량의 얘기를 나눴다. 스타트업으로의 이직에 대해서 나름 관심 있어했지만 지나가는 말 중 하나가 되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면담이 끝이 났다. 6년을 다닌 것 치고는 예상보다 짧았다. 그날 이후 회사 일이 더 많아진 듯했다. 내 일과 문서 하나를 쓸 때도 자연스럽게 설명을 더 붙이게 됐다. 나중에 읽을 사람이 있다는 걸 의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틈틈이 업무 파일을 정리하여 보기 쉽게 만들어뒀다. 나는 생각보다 정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팀원들에게는 조금 늦게 말했다. 팀 점심 회식으로 근처 유명한 맛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요즘 흑백요리사 2에 나왔다고 했다. 회사 이야기보다는 줄이 얼마나 길지에 대한 투덜거림과 방송에서 나온 음식 이야기가 오가던 중 퇴사할 예정이라고 얘기하자 팀원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놀라는 사람, 아쉬워하는 사람, 이미 눈치챘다는 듯 웃는 사람. 누군가 농담처럼 말했다.
"어떤지 요즘 문서 정리를 깔끔하게 하더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타트업으로 이직한다고 하자 말들이 겹쳐 나왔다. 위로도 아니고, 만류도 아니었다. 각자 방식으로 아쉬움을 표하는 소리들이었다.
"거기 가면 고생 많이 하겠네요."
"여기보다 정신없으려나?"
"대신 재미는 있겠다."
"드라마에 나오는 실장님 같은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누군가 그렇게 말했고 몇 명이 웃었다.
그날 팀 회식의 주인공은 나였다. 메뉴를 고를 때도 추가 주문을 할 때도 자연스럽게 내 쪽을 보았다. 한참을 먹고 있는 와중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언제까지 출근하느냐 인수인계는 어떻게 되느냐 같은 실무적인 질문도 있었고, 뜬금없이 결혼 이야기도 나왔다.
"결혼하면 꼭 초대해야 돼요."
"그건 의무입니다, 꼭이요."
누군가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 안에는 빠져나갈 수 없는 압박이 섞여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알겠다고 했다. 짧은 점심식사가 끝나고 복귀하는 길에 동료 한 명이 툭 치면서 말했다.
"그래도 가끔 얼굴 보러 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실제로 지켜질지 그렇지 않을지는 서로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사람을 붙잡지는 않지만 보내는 방식만큼은 나쁘지 않구나.
예정되었던 한 달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마지막 출근 날 책상 위를 정리했다. 서랍에는 생각보다 많은 메모가 남아 있었다. 대부분은 이제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노트 몇 권을 버리고 개인 물건만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퇴사 메일을 작성했다. 퇴사 메일을 쓰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게 쓸 필요가 없었다.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메일을 보고 옆 팀원이 의자를 끌고 와서 옆구리를 찔렀다. 장난치고 싶어서 못 참겠다는 얼굴이었다.
"회장님, 성공해서 저 좀 데려가주세요."
스타트업 이직한다 하니, 드라마 실장님이던 별명이 한 달 새 회장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는 나도 그 호칭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내심 즐기는 중이다. 거만한 표정과 자세로 받아쳤다.
"자네 하는 거 봐서."
잠깐 웃고 각자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별다른 작별 인사는 없었다. 상사는 따로 말을 걸지 않았다. 대신 퇴근 직전에 와서 짧게 말했다.
"가서도 잘해. 뭐 알아서 잘하겠지만."
"나중에 술 한잔 하자."
그 말은 위로도 격려도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톤이었다. 그리고 여지껏 볼 수 없었던 존댓말이 아닌 편한 반말이었다. 회사 문을 나서며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이미 충분히 익숙한 공간이었고 다시 올 수도 있는 곳이었다.
새로운 출근길은 익숙했다.
알람 시간도 셔츠도 지하철에서 서는 위치도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몸은 아직 이전 회사의 리듬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도착지가 달랐다. 익숙한 동선 끝에 낯선 건물이 있다는 게 이상했다.
건물 앞에서 잠깐 멈췄다. 회사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간판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크지는 않았다. 멀리서 봐도 회사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도 앱을 한 번 더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었다. 아직은 남의 회사에 방문한 사람처럼 조심스러웠다. 사무실은 한눈에 들어왔다. 칸막이는 없었고 사람 수보다 책상이 더 많았다. 아직 완전히 채워지지 않은 공간 특유의 울림이 있었다. 예전 회사라면 벌써 자리가 꽉 차 있었을 시간이었다. 들어가는 복도에서 걷는 발소리가 낮게 메아리를 치며 울렸다.
홍세진 교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이제부터는 교수님이 아니라 대표님으로 호칭이 바뀔 예정이다.
"최 박사, 일찍 왔네요."
"대표님,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대표실에서 잠깐 얘기를 나눴다. 앞으로의 회사 방향과 환영 회식 일정을 번갈아가며 얘기를 했다. 그러곤 수업이 있다며 급하게 옷을 챙겨 입고 나가면서 얘기했다.
"오늘은 그냥 분위기 보시면 됩니다. 먼저 뭘 해야 되는지 인사팀 직원이 안내해 줄 거예요. 첫 날에는 자꾸 뭘 해야 된다고 하네."
안내해 준 자리에 앉자 노트북 하나와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노트를 펼치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회사 로고도 날짜도 심지어 줄도 없었다. 정말 백지의 새 노트였다. 아마 '노트 하나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같은 말에 급히 준비한 듯 보인다. 먼저 인사 담당자라 소개한 앳된 여자 직원이 이런저런 서류를 요청했다. 그리고 사내 메신저 가입 등을 안내해 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안내에 따라 모든 가입을 완료하고 나니 전부 텅 빈 인터페이스가 보였다. 먼저 메일함을 열었다. 새 메일은 없었다. 예전 회사라면 이 시간에 이미 몇 개의 알림이 쌓여 있었을 텐데. 승인 요청, 일정 공유, 회의 소집. 그 모든 소음이 여기에는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괴롭히던 쌓여있는 소음이 갑자기 사라진 상태가 자유롭기보다는 오히려 당혹스러웠다.
사람들이 하나둘 출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팀원들을 소개받았다. 우리 팀은 나를 포함해서 총 5명이었다. 회사에 출근한 지 2주도 안 된 팀원들이 대부분이었고, 여기가 첫 직장인 사람이 전부였다. 아직은 업무 분장도 되지 않아 이전 연구 데이터를 정리 중이었다고 한다. 업무 분장은 내일 오전 10시로 잡혀 있어서 이번 주는 업무 파악 와 준비시간으로 계획했다. 그리고 경력직 팀원은 계속 면접을 보고 있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되어 다 같이 밖으로 나갔다. 새로운 사람들이 많아 요즘 매일같이 점심 회식을 한다고 한다. 회식은 평범했고 대화도 평범했다. 실험이 잘 안 된 이야기, 장비가 늦게 온다는 불평 그리고 이전 회사랑 비교하는 농담. 커피 하나까지 사들고 나서야 1시를 좀 넘긴 시간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 문서 몇 개를 열어봤다. 공정 개요 파일에는 엉성한 그래프와 코멘트가 뒤섞여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결과. 그건 익숙했다. 다만 예전에는 그다음 단계가 명확했을 뿐이다. 지금은 어느 것도 확정된 게 없었다.
오후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홍 대표가 내 자리로 왔다.
"이거 한번 봐주시겠어요?"
그가 보여준 건 생산 공정 초안이었다. 프로세스 개요도만 있고 세부적인 공정 조건은 모두 생략되어 있었다. 애초에 무슨 제품을 생산하는지에 대한 결론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연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생산하는 데는 문제없죠?"
나는 화면을 보며 잠깐 멈췄다.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이전 회사의 회의실이 떠올랐다. 수십 장의 슬라이드, 질문, 반박, 합의 그리고 최종 승인.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그 모든 과정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아직은 세부적인 내용도 없고 무슨 제품을 만드는 지도 명확하지 않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내용으로 다음 주 미팅에서 정리한 걸 보여주세요."
그 순간 명확해졌다. 여기서는 문제 제기로 끝나지 않는다. 말한 순간부터 자연스레 책임이 붙는다. 스타트업이라서 이런 건지 내가 팀장으로 들어와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4 시부터 하나둘씩 자리를 떴고 나도 이른 시간에 노트북을 닫았다. 회사 밖으로 나오며 생각했다. 이곳엔 나를 보호해 주던 매뉴얼도 책임을 나눠 가질 시스템도 없다. 누군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속도를 내는 법은 배웠지만, 이제는 길 자체가 어디로 나야 하는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퇴근길 가방 속 새 노트의 첫 장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무게는 아침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 내일부터는 노트를 처음부터 차근차근히 채워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