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후 팀장님과의 첫 만남

기록에 미친 사람

by 영초이

전 직장 팀장님과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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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에서 막 나온 참이었다. 노트며 노트북이며 챙기느라 손이 모자란 와중에 전화가 울렸다. 부랴부랴 자리에 돌아오니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 확인해 보니 이전 팀장이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채 한 번 울리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았다.

"최 박사, 지금 시간 좀 돼?"


이전과 같은 목소리였지만, 지시하는 톤도, 확인하는 톤도 아니었다. 그리고 존댓말에서 조금 편해졌다.

"네.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 그냥 안부나 좀 물어보려고."


그는 본래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퇴사 후 첫 통화에서 용건부터 말하지 않았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건 말의 방식뿐만 아니라 말의 여유였다.

"거기 가더니 어때?"

"정신없죠."

"그럴 줄 알았다. 원래 새로운 것 시작하면 제일 바쁜 사람이잖아."

"그랬나요?"

"뭐 하나 하자하면 이것저것 다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지. 그래서 좋게 봤던 거였지."

"나름 노렸던 건데 통하긴 했나 보네요."


잠깐의 웃음. 그가 이제야 본론을 꺼냈다.

"다름이 아니라, 마지막에 했던 일이 지금 잘 풀리고 있어. 기록을 잘 남겨놔서 별로 고칠 것 없이 잘 돌아가더라고."

"근데 몇 가지 설명이 필요한데, 지금 길게 통화 가능해? 내용이 좀 많은데."


지금 시계를 보니, 길게는 통화가 어려웠다.

"지금은 좀 어려운데요. 혹시 4시 이후에 다시 통화 가능하세요?"

"그럼 그러지 말고 오늘 저녁에 술 한잔 어때?"

"좋죠. 제가 회사 앞으로 갈게요. 회사 앞에 고깃집 아직 하죠? 삼쏘 한잔하면서 얘기하시는 건 어때요?"

"회사 앞 말고 다른데 없어? 회사 앞에서 먹으면 퇴근 안 한 기분이라서."

"제가 오랜만에 가고 싶어서 그래요."

"그래. 그 일 지금 양 박사가 맡고 있는데 같이 봐도 괜찮지? 둘이 친했잖아."

"엥? 양 박사? 아 디펜스 끝냈나 보네요? 같이 보면 좋죠. 좋아요."

"그럼 이따가 6시에 봐."

"이따 뵐게요."




전 직장 사람들과의 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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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전 회사 앞 식당에서 만났다. 두 회사의 거리는 버스로 딱 두 정거장. 가깝지만 이직 후 한 번도 지나갈 일이 없던 길이라 묘하게 낯설었다. 식당 안에는 팀장님과 양지연 박사가 이미 고기를 구우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고기를 굽는 모습이 예전 회식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오, 최 박사. 회사 나가더니 살 좀 빠졌네?"

"정남님, 왜 이렇게 깔끔해졌어요?"


팀장과 양지연 박사는 보자마자 역시 퇴사가 힐링이다라는 얘기와 함께 반가운 인사가 오갔다.

"팀장님도 좀 빠졌는데요?"

"에이. 이제 그 팀장이라는 말 하지 마."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자연스레 양 박사가 된 지연님에게 축하를 건넸다.

"지연님은 박사 됐다면서. 이제 디펜스 끝낸 거야? 이제 양 박사님이라 불러야겠네?"

"어휴, 겨우 디펜스 종심 끝냈어요. 이제 박사님 소리 들어야겠어요. 돈 들인 게 아까워서라도."

"예예. 양 박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회장님이 더 잘 봐주셔야죠."

"소맥 한잔 할 거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소맥을 마셨다. 이직한 곳의 사정, 결혼과 육아휴직 소식 등 두 달 사이에 쌓인 이야기가 넘쳐났다. 한참을 얘기하던 도중 팀장은 자연스럽게 일 이야기를 꺼냈고, 나는 기억나는 대로 하나하나 답해주었다. 양 박사가 나중에 정리해 보고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기로 하며 먼저 자리를 일어났다. 아쉬움이 남은 나는 팀장님과 2차를 가기로 했다.


맥주 집에서 맥주와 먹태를 시켜놓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전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팀장님이네?"

"그렇죠.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데서 시작해서 무슨 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갑자기 팀장 달았잖아. 3년 전인가? 당연히 내 바로 위 선배가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이직하는 바람에"

"그랬죠. 그때 한참 힘들어하셨잖아요. 세 달쯤 됐을 때 못해먹겠다고 이직할 거라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야이. 최정남. 그때는 한참 어려워하더니 이제는 막 까부네? 이제 팀장 달았다 이거지?"


우리는 한참 웃으며 그의 흑역사를 들췄다. 그리 사뭇 진지하진 그가 말했다.

"그때는 그랬지."

"위에서는 깨지고, 동료 팀장들 사이에서는 잘하는 척 연기하고. 제일 힘들었던 건 팀원들 앞에서 결정한 척하는 거였지."

"집에 가면 내 결정이 맞나 싶어 잠도 안 오는데, 회사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니까. 그게 힘들더라고."

"그래서 요즘은요?"

"요즘도 비슷해."


그는 단숨에 남아있는 맥주를 들이켜고 다시 한잔을 시켰다. 그리고 흘러가듯이 물었다.

"너는 어때?"

"아직은 모르겠어요. 이게 맞나 틀리나 고민할 틈도 없이, 뭐부터 해야 할지 그냥 막막하기만 하죠."

"제일 어려운 거네."

"그런가요?"

"음.. 조언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원래 잘하던 거 해."

"잘하는 거?"

"그거 잘하잖아. 다 기록으로 만드는 거. 말로 못하겠으면 네가 잘하는 걸로 밀어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가볍게 건배하고 맥주잔을 반쯤 비웠다. 그는 먹태를 하나 집어먹으며 덧붙였다.

"요즘 오늘 얘기한 문제가 자잘하게 생기니까 네 생각이 나더라고."

"왜요?"

"예전에는 빽빽한 기록 덕분에 처리하기 쉽던 것들이 지금은 뭔가 기록이 조금씩 빠져있는 느낌이야?"

"진짜 기록에 미친 사람처럼 얘기하네요."

"엥? 그거 맞아. 기록에 미친 사람처럼 굴 때, 그땐 아무도 안 들었지. 그리고 좀 외골수여야지."

"진짜 아무도 듣지 않았어요?"

"응. 나도 포함해서."


그는 웃었다.

"근데 지나고 보니 기록은 계속 남아있더라."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게 좀 든든했더라고."


이게 기록에 대한 칭찬인지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인정인지 모를 그 말에 위안이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했던 일이 헛된 건 아니었구나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2차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마지막 잔을 비운 그는 계산서가 집어 들었다. 택시를 기다리며 그가 말했다.

"팀장 노릇 잘하려고 애쓰지 마. 그냥 해봐. 나도 하는데, 뭐."

"에이, 내가 본 사람 중에 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무슨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이제 사회생활을 다 하네?"


잠깐 서 있다가 그가 말했다.

"팀장 자리, 생각보다 외로워."

"근데 너라서 하는 거야."


이 사람이 이렇게 따뜻했었나 싶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는 흔한 충고나 위로보다 더 큰 무게가 실려 있었다. 택시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지만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택시에 오른 팀장은 종종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부른 택시도 곧 도착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 마지막 말을 곱씹어보려 했지만 취기에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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