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첫 번째로 한 일

기록부터 만들었다

by 영초이


기록 없는 회의


회사에 출근한 첫 주 동안 나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했다. 이 회사에서는 일이 언제 끝난 걸로 치는 걸까.


회의는 거의 매일 있었다. 이 회사에서 가장 잘 꾸민 공간이라고 하면 회의실일 것이다. 20명 이상이 화상 미팅을 할 수 있고 인테리어의 문외한인 내가 봐도 비싸 보이는 목재로 꾸민 공간. 그렇지만 이 아름다운 회의실에서는 엄숙할 만큼 조용한 회의가 매번 진행되었다. 활기차지도, 긴장감 넘치지도 않은 조용함이었다. 회의라고 하기엔 대학원 때의 랩미팅이 떠오르는 회의였다.


회의가 시작되면 누군가는 노트북을 열고 누군가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잘 꾸며낸 슬라이드를 띄우고 "그럼 어제 실험 결과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면 회의가 시작되었다. 슬라이드 한 장에 실험 사진과 그래프가 화면에 빽빽하게 채워지면, 이에 대한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질문이 바로 들어왔다.

"그 조건은 왜 그렇게 잡았어요?"

"이건 임시로 돌린 거죠?"

"그럼 이 데이터는 아직 의미 없다고 보면 되나요?"


질문과 대답흥미로웠지만 정리는 없었다. 결론에 다가가기 전에 누군가의 다른 이야기가 끼어들었고, 그 다른 이야기는 지나간 슬라이드를 다시 불러왔다. 그러다 결론에 가까워질 즈음이면 누군가 말했다.

"아, 이건 더 확인해 보고 다음 미팅에서 다시 얘기해도 될 것 같아요."


그 말과 함께 안건은 자연스럽게 뒤로 밀렸다. 회의가 끝나면 모두 각자 자리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 순간부터 방금 회의에서 나눴던 말들은 급속도로 흐릿해졌다. 이후 회의 내용에 대해서 얘길 하면 누구는 "그건 하기로 했잖아요"라고 말했고, 다른 누군가는 "아직 검토 단계 아니었어요?"라고 반문했다. 둘 다 틀리지 않았다. 다만 어느 쪽도 증명할 수 없었다. 다만 어느 쪽도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야 말고 회의 안건이 공중으로 증발해 버렸다.


나는 그게 이상했다. 이 회사에는 이상하게도 결정이 필요한 순간만 되면 모든 의견이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결정처럼 보이는 말들만 남고 결정은 없었다. 문득 지난달에 있었다는 세포 오염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배양 중이던 세포가 박테리아 오염이 있었음을 확인했고, 이 배치의 샘플이 그대로 전량 폐기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았다. 모두가 기계 결함이나 샘플 상태 탓으로 돌리며 유령처럼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회사는 실패의 가능성을 너무도 두려워했다. 애초에 모든 결과는 희망만을 노래했다.


회사에서 지급받은 노트를 펼쳤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텅 빈 노트였다. 그 노트는 이상할 정도로 이 회사와 잘 어울렸다. 내가 이 회사에 이제 막 들어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그리고 회사 일이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 물건이기도 했다. 입사 후 첫 번째 미팅에서 열심히 적은 문장을 다시 읽어봤다.


'동물실험 결과, 훌륭.'

'그런데 아직 단백질이 어떤 형태로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없음.'

'효과가 나오면 생산이 잘 되었다고 판단.'

'동물 실험이 이렇게 단기간에 나온다고?'

'생산팀도 동물실험을 하네? SCI급 논문 2개 작성이 왜 생산팀 목표에 들어가 있지?'


적혀있는 메모가 밑으로 내려갈수록 마침표가 아니라 물음표로 끝나는 문장이 많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적은 2개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문장들은 아주 짧았다.

'누가 결정했는지 모른다. 책임은 누가 지는 거지?'


그 문장을 다시 읽고 나서야 내가 왜 일주일 만에 불편함을 느낀 건지 알 것 같았다. 실패뿐만 아니라 실패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그리고 애초에 실패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기록의 불편함

금요일 오전 회의가 끝나고 연구팀의 팀장과 커피 마시면서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회의 후 궁금했던 내용을 물어봤고 연구팀장은 귀찮은 내색 없이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정말 학회에서 자주 보던 그리고 대학원에서 보던 연구원의 모습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이상하게 반복되는 동물실험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개발하는 뇌질환 치료제가 아니라 관절염 치료제였다. 회의 시간에도 갑자기 웬 관절염 치료를 뇌질환 치료 단백질로 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의구심이 있었던 내용이었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관절염 동물실험이 엄청 많네요. 같은 단백질을 사용한 것 같은데 관절염 치료 기전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질문은 자연스럽게 흘려졌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예전에 그런 방향 얘기가 나왔던 것 같아요. 대표님이 파이프라인 확장이 필요해서 꼭 봐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던 연구팀장의 말끝이 흐려졌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이미 답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나는 회의가 끝나면 짧은 정리를 회의 참석 인원들에게 메일로 보냈다. 결론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문장들이었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를 적었다. 그리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것들은 미결이라고 표시했다. 메일을 처음 보냈을 때, 반응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이건 아직 확정 아니었는데요."

"이렇게 정리되면 부담되네요."


이후 점심시간 탕비실에서 마주친 연구원들의 시선은 묘하게 어색해졌다. 그들에게 메일은 공유가 아니라 감시였다. 부담스러운 건 내용이 아니었다. 회의 내용이 문장이 남는다는 사실이었다. 말은 부정할 수 있지만, 글은 부정하기 어렵다. 회의 시간에 나온 말은 그대로 기억되기 어렵지만, 정리된 글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되었다.


나는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니, 회사생활의 전부는 기록이라 생각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GMP 현장에서 배운 건 기술이 아니라 기록이 사람을 어떻게 묶는지에 대한 감각이었다. 물론 대표와 이사들은 정리된 내용을 보고 좋아했다. 그렇지만 실무 입장에서는 아니었다. 며칠 뒤, 연구팀과의 회의에서 처음으로 노골적인 반응이 나왔다.

"테스트 연구 단계에서 이런 회의록이 꼭 필요해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시선은 분명히 나를 향해 있었다.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이렇게 답했다.

"이 단계라서 필요해요. 개발 초기부터 누가 무엇을 얘기했고 결정했는지 남길 필요가 있어요."


누군가는 의자에 등을 더 깊이 기대었고, 누군가는 노트북을 닫았다. 그 반응을 보며 깨달았다. 나는 지금 속도를 늦추는 사람이 되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속도와 확정되지 않은 시험임을 이야기했다.

"일단 만들어봐야 알죠."

"지금은 실험 단계잖아요."

"하나하나 따지면 늦어요. 매일 미팅하는 거 아시잖아요."

"미팅 때마다 바뀌는 내용을 일일이 적어야 하나요?"


나는 반복을 이야기했다.

"조건이 바뀌면 이 데이터는 쓸 수 있나요?"

"그래도 기록은 해야 합니다.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아야 해요."


한 연구원이 말했다.

"이건 그냥 테스트예요."


그 말은 공격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테스트는 부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테스트는 늘 가장 많은 사고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테스트라는 이름 아래 기록은 생략되고 조건은 흐려지고 책임은 사라진다. 그들은 일단 만들어봐야 안다며 속도를 말했고, 나는 조건이 바뀌면 데이터를 쓸 수 있느냐며 반복을 말했다. 양 팀 간의 대화는 전혀 다른 기준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짜증보다는 피로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때서야 이게 갈등이 아니라 방법이 없다는 신호라는 걸 알았다. 답이 없다가 아니라 어떻게 하냐는 물음이었다.





첫 기록 문서와 변화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나는 아주 단순한 파일 하나를 만들어 공유했다. 생산요청서라고 부르기엔 거창했고, 메모라고 하기엔 체계적이었다. 항목은 네 개뿐이었다.

이걸 왜 만드는지.
어디에 쓰일 건지.
무엇을 만들 것인지.
언제까지 필요한지.


우리가 생산하는 제품에는 목적과 방법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생산요청서와 기록서를 설명하기 위해 연구 팀과 미팅을 잡았다. 이 미팅에 정 이사도 참석했다.


나는 충분히 설명했다. 테스트 데이터가 어떻게 임상시험계획 (investigational new drug, IND) 자료로 연결되는지, 연구와 비임상 그리고 임상 목적을 갖는 제품 간의 품질 일관성이 왜 중요한지, 동등성 입증이 어디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는지를 설명했다. 내가 노이로제가 걸릴 만큼 부딪혀왔던 지점들이었다. 이 내용에 몇몇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테스트와 비임상/임상 샘플에 대해 구분을 하고 관리할 예정이고 어떻게 관리하고 기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이 10분 정도의 짧은 설명회를 마쳤다. 연구팀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너무 딱딱한 거 아니에요?"

"테스트 샘플에서 이런 형식까지 필요한가요?"


하지만 설명은 늘 반박을 낳는다. 나는 반박에 대해서 맞서는 대신 기다렸다. 며칠 뒤, 첫 요청 메일이 도착했다. 빈칸이 많았고 표현은 애매했다. 그래도 이전과 달랐다. 누군가 처음으로 생각을 적으려 노력한 흔적이 있었다. 비고란에 처음으로 '관절염 테스트용'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적혀 있었다.


그날 퇴근 전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팀과 내외부 공유할 기록 정리. 기록서와 양식이 필요하다.'


이 파일들은 단순히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이 회사가 가져야 할 첫 번째 규정이 될 것이다. 노트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이 회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방법부터 만들어야 했다.



그게 내가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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