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임상 샘플 생산 회의

아직 희망을 얘기하기에는 너무 준비가 안되어있다.

by 영초이

계속 바뀌는 생산 공정


생산 요청 양식이 생겼다고 해서 모든 게 바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이전처럼 '이거 하나만 급하게 만들어주세요'라고 말로 툭 던지는 요청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 대신 목적와 이유가 붙은 문서가 오갔다. 그 이유가 타당한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적어도 생각한 흔적은 남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조건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주 사소했다.

"이 조건 말고요. 농도는 조금만 바꿔볼게요."

"샘플 용도가 살짝 달라졌어요."


연구 조건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연구원 생활을 해본 나에게는 불편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바뀌지 않는 조건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바뀐 조건이 기록에서 남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제까지 정설이었던 조건은 오늘 회의 자료에서 슬그머니 빠졌고 이전의 조건은 자연스럽게 잊혔다. 최신본이라는 이름의 파일은 쌓여갔지만, 그 최신이 무엇을 기준으로 업데이트된 것인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버전은 늘었지만 이력은 없었다.


어느 날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동물 실험을 위한 샘플 생산을 진행하던 중이었다. 기기에 입력한 온도 조건이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달랐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표준작업절차 문서의 값보다 낮았다.

"이 조건 잘못 입력한 것 같은데요?"


생산을 한창하던 팀원이 연구팀에서 요청한 내용이라 말했다. 이걸 보고도 안하고 바꾸었다니. 살짝 두통이 밀려왔다. 일단은 생산을 진행시키고 연구팀장과 얘기를 했다.

"생산 조건이 바뀌어 있더라구요."

"논문을 보니 이 조건이 더 단백질 생산량이 늘어난다고 하길래요."

"미리 요청을 하셨어야죠. 요청서에는 내용이 없어서 몰랐거든요."

"아, 그건. 아직 정리 중이었어요."

"자꾸 바꾸면 생산 공정 잡기가 힘들어집니다. 테스트였다면 문제없지만, 유효성 평가 샘플인데 일관성이 깨지면 나중에 이 자료를 못쓰게 돼요."

"더 좋아지면 좋은거 아니에요?"


그 말 한 줄로 이전에 세워둔 모든 계획은 의미를 잃었다. 그리고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잦은 변경보다 무서운 건 계획 없는 변경이었다. 나는 기준과 기록 항목을 하나 더 만들었다. 조건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바뀌는 순간, 그 사실은 반드시 남겨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가 알게 공유되어야 한다. 나는 실험실에서 가볍게 넘긴 변경 하나가 수십억의 실책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나는 이전 회사에서 수없이 봐왔다. 수 억씩 들어가는 임상시험용 제품의 생산 공정이 멈추고, 수십억이 들어가는 비임상 시험을 다시 해야되는 최악의 경우도 말이다.


바뀐 기준을 공유했을 때 연구팀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갈등은 잠잠해지지 않았고, 다만 방향을 틀었다. 대놓고 부딪히는 대신, 말수가 줄었다. 요청은 형식적으로 채워졌고, 조건 변경은 메신저로 흘러왔다. 나는 그걸 하나하나 문서로 옮길 것을 요청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역할이 굳어졌다. 조건이 바뀌면 가장 먼저 알려야 하는 사람. 내가 원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자리였다.


그렇지만 이게 가장 큰 문제는 다음에 터졌다.




준비되지 않은 비임상 시험


어느 날 회의에서 홍 대표가 말을 꺼냈다.

"비임상 샘플부터 하나 만들어보죠."


연구팀은 고개를 끄덕였고 일정 이야기가 바로 뒤따랐다. 투자 일정과 외부 미팅 같은 다음 단계 이야기가 빠르게 이어졌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다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지 않았다.

"대표님."


회의 흐름을 끊는다는 걸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비임상 샘플의 목적이 정확히 뭔가요?"


대표는 잠깐 멈췄다가 답했다.

"뇌질환 치료 연구에서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있어요. 그래서 다음단계로 넘어가려고요."


그 말은 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방향이 아니라 순서였다.

"그럼 이 샘플은 비임상 독성 시험에도 사용하는 건가요?"

"그렇죠. 다음달에 첫번째 안전성 평가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위탁시험기관과 계약을 하고 있어요."


이건 테스트가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계획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해 다시 말했다.

"대표님, 이 샘플로 비임상 시험에 들어가면 생산 공정이 사실상 확정이 됩니다. 이후 임상시험용 샘플도 동일한 생산 방법을 따라가야 합니다."

"조금의 변경은 가능하지 않나요?"

"조금의 변경은 가능할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공정 조건 변경이 되더라도 품질은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우리의 생산 공정은 비임상 시료 생산에 어울리지 않았다. 지금은 생산 조건은 계속 바뀌었고 품질의 일관성은 계속 흔들렸다. 이대로 비임상 시험 샘플을 생산한다면 나중에 만들때마다 품질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은 생산 조건이 계속 조금씩 바뀌고 있습니다. 그 조금의 변경이 품질 일관성을 떨어트리고 있어요. 조건이 바뀔 때마다 품질 특성도 같이 움직이니 이걸 같은 샘플이라 얘기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비임상 단계가 아니라 공정 연구 단계입니다."


대표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지금처럼 품질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비임상에 들어가면, 나중에 임상 단계에서 다른 물질로 시험했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생길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비임상 시험을 아예 다시 해야될 수도 있어요."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거죠?"

"적어도 확정된 공정으로 동일한 품질로 생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임상 샘플 생산을 파일럿으로 몇번 해보고 조건을 잡아보겠습니다. 먼저 비임상 샘플의 스펙부터 확정한 후에요."

"이제 이해가 가네요. 연구팀에서는 비임상샘플의 스펙은 다 잡아놓았죠?"


이에 연구팀에서 말했다.

"그건 아직입니다. 지금은 더 좋은 품질을 만들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중이거든요."

"더 좋은 품질이 중요하죠. 그럼 더 잘 만들 수 있게 빨리 진행해주세요."


홍 대표는 다시금 연구팀과 더 좋아질 제품 스펙과 관련한 내용으로 회의를 이어갔다. 아직 회의에서는 더 좋은 품질을 얘기하고 있다. 이렇게 마무리가 되면 안됐다. 나는 다시금 얘기했다.

"더 좋은 품질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품질의 변화입니다. 새로운 조건을 잡고 나면 적어도 10 배치는 테스트 생산해서 일관성을 확인해봐야해요."

"그럼 너무 늦어요."


대표는 한 발 물러서든 이렇게 얘기했다.

"일단 만들어보자는 거죠. 데이터를 보고 판단하면 되니까요."


연구실에서는 늘 듣던 가장 익숙하지만 경계하던 말이 나왔다. 나는 숨을 고르고 가장 위험한 질문을 물었다.

"이 샘플, 실패해도 괜찮은 건가요?"


회의실이 급격히 조용해졌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와 연필을 쓰는 소리가 갑자기 멈추니, 노트북 쿨러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홍 대표는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실패라는 표현보다는..."


말을 고르던 대표가 한참 후에야 입을 뗐다.

"아니요. 실패하면 안 되겠죠."

"그럼 지금은 만들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바로 반박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품질이 확정되고나면 그 품질이 유지되는지 파일럿 테스트를 해보겠습니다. 다만 그 전까지는 비임상 시험용 샘플이 아니라 연구용 샘플입니다."


이후 추후 일정에 대한 논의를 했고 회의는 그렇게 끝났다. 회의실을 나오는데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대표와 연구원 몇 명의 표정이 눈에 밟혔지만 노트를 꽉 쥐고 걸음을 옮겼다. 누군가는 분명 불편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편하지 않았다.


이 회사에서 앞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더 좋아질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만드는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는 조건이 바뀌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대신 언제 그것을 확정할지는 결정해야 했다.


그게 내가 이 회사에서 두 번째로 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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