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닭 팀장
회의가 끝난 후 자리로 돌아오니 사무실 공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불평불만에 속도를 늦춘 사람이 된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니터를 켜니 빈 워드파일에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때 김유진 선임이 의자를 끌고 와서 물었다.
"팀장님. 회의실 분위기 장난 아니었다면서요? 비임상 샘플 드롭된 거예요?"
나는 땀에 젖은 노트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드롭이 아니라 잠시 늦춘 거예요."
김 선임은 이전 보고 없이 온도를 바꿨던 그 담당자였다. 문득 그때 온도 사건이 오늘 회의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정 온도를 바꾼 날, 연구팀장과 면담 후 김 선임에게 메신저를 보냈다.
"생산 끝나면 오후 3시쯤 회의실에서 얘기해요."
약속된 시간에 김 선임이 쭈뼛쭈뼛 회의실로 왔다.
"아까 온도 왜 바꿨죠?"
김 선임은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구팀에서 데이터가 더 잘 나온다고 해서요. 괜히 제가 못한다고 하면 또 생산팀이 딴지 건다는 소리가 나올까 봐..."
"우리가 딴지 거는 팀으로 보이는 게 그렇게 부담돼요?"
그가 솔직하게 말했다.
"좀 그렇죠. 연구팀은 결과를 내고 있고 우리 팀은 안된다고 하는데. 괜히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고."
나는 아까 챙겨 온 생산 기록서를 책상 위에 펼쳤다. 며칠 사이 바뀐 조건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온도 2도, 반응 시간 5분, 교반 속도 50 rpm. 사소해 보이지만 누적되면 전혀 다른 공정이 된다. 이건 과한 반응이라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신뢰와 정확성을 요구하는 우리 일에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였다.
"연구팀은 이것저것 해보는 게 중요한 거 이해해요. 좋은 걸 만들고 싶으니까 이것저것 바꾸고 싶으니 빨리빨리 해보는 것이 좋겠죠."
"근데 생산팀은 안전한 제품을 일정하게 만드는게 중요해요. 그리고 사람한테 쓰는 약인데 깐깐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김 선임이 바꾼 그 온도 2도가 나중에 품질 실패로 나오면 그때는요? 연구팀이 자기들이 요청했다고 얘기해 줄 것 같아요?"
몰아붙이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사실을 그대로 얘기한 것뿐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톤을 낮춰서 얘기했다.
"조건 변경 요청이 오면 저랑 얘기해요. 같이 조율해 보죠."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장님이 이렇게 나서면 부담되지 않으세요?"
나는 피식 웃었다. 그 선한 사람이었다. 석사 졸업하자마자 이 회사에 취업해서 이제 막 회사를 다니는 신입이었다. 여기 오기 전까지는 연구만 하던 사람이었다. 생산팀보다는 연구팀에 더 어울릴 법했다. 그렇지만 생산팀으로 온 이상은 이 일에 맞게 캐릭터를 정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제품을 책임지는 게 우리 일이에요."
피식 웃으며 말이 끝나자 김 선임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아까까지 굳어 있던 표정도 조금 풀렸다. 내 고집은 그들이 감당하지 않아도 될 책임을 덜어주는 방식이었다. 적어도 우리 팀이 전후 사정을 모른 채 위험과 책임을 떠안는 일은 없게 하고 싶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생산 연구는 가끔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이 주어지곤 했다. 그러나 석사 신입인 김 선임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이 주어져야 했다.
비임상 생산 미팅 후 다음날 오후에 생산팀을 모아서 회의를 했다. 회의실 공기가 여전히 긴장돼 있었다. 다들 어제의 비임상 회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나는 모니터를 켜고 회의 내용을 정리하여 전달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할 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자, 이제 우리 할 일 정리합시다."
"비임상 생산 개발은 먼저 크게 2가지부터 하죠."
먼저 이번 주에 확인해야 할 내용을 정리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현재 조건 변경과 품질 변화를 수치화하는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후보 공정을 3개 이하로 축소하는 근거를 만들고자 했다. 먼저 품질 차례다.
"품질 담당자들은 단백질 의약품 규정을 찾아보고 임상시험용 의약품 품질 기준을 찾아서 정리해 주세요."
"그럼 저희가 하는 평가를 정리하면 되나요?"
"그것도 필요하고, 무균시험, 바이러스 시험 같이 의약품 허가에 관련한 품질 규정이 있어요. 그리고 약전 기준도 확인해 주세요."
그다음은 생산 차례다.
"지금 공정 쪼개기부터 해 보죠. 공정을 단계별로 나눠주세요. 배양액 제조부터 세포 배양, 정제, 포장까지요."
"그럼 업스트림(Upstream), 다운스트림(downstream) 나눠서 각 단계별로 정리해볼게요."
"그 후에는 사용하는 자재나 시약의 양부터 확인해 봅시다. 그리고 사용되는 자재가 의약품 생산에 사용할 수 있는 자재인지 꼭 확인해 주세요. 약에 섞일 수 있는 원료들은 약전 등재나 GMP 환경에서 제조했는지 꼭 확인해 봐야 돼요."
누군가가 이렇게 얘기했다.
"갑자기 또 바빠졌네요. 저희 팀이 제일 바쁜 것 같아요."
회의가 끝나니 벌써 퇴근시간이었다. 회의 초반 얼었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김 선임이 얘기를 했다.
"퇴근할 시간도 됐는데, 오늘은 회식하는 게 어때요? 고기 어때요?"
김 선임이 잘 아는 삼겹살 집이 있다고 했다. 다들 잠깐 눈치를 보다가 결국 첫 번째 팀 회식을 하게 되었다. 이런 급작스러운 회식은 나도 사양이었지만, 이 시점에 할 필요는 있었다.
김 선임이 잘 아는 고깃집은 이전 회사 근처였다. 불과 며칠 전, 이전 팀장님 그리고 양 박사와 함께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던 바로 그 집이다. 그때는 내가 퇴사한 사람으로 앉아 있었고 오늘은 팀장으로 앉아 있었다. 같은 가게인데도 기분은 전혀 달랐다.
우리는 자리를 잡고 삼겹살을 시켰다. 익숙한 고기 굽는 냄새가 퍼졌지만 처음엔 다들 말이 없었다. 뭔가 더 어색한 느낌이었다. 회식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첫 모임이었다. 이럴 때는 팀장님은 어떻게 했더라? 그때 김 선임이 입을 열었다.
"일단 맥주 한 잔씩 하시죠. 술 다들 드시죠?"
"저는 술을 못 먹습니다."
"오늘은 저녁에 일정이 있어서.."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결국에는 나와 김 선임 둘이서 맥주 한 잔씩 마셨다. 괜히 둘이만 건배를 하려니 더 어색했다. 일단 오늘 고생했다는 의미로 맥주 잔과 물 컵을 부딪쳤다. 처음엔 별다른 얘기가 없었다. 요즘 본 영화. 어디 맛집이 괜찮더라. 주말에 어디 다녀왔다는 이야기. 회사 얘기는 다들 조심하는 눈치였다. 웃음도 조금 어색했다. 그러다 누가 툭 던지듯 말했다.
"솔직히 어제 회의 끝나고 무섭긴 했어요."
"뭐가요?"
"우리가 준비 안된 거 티 나는 거요."
나는 소주 한잔을 마시고 고기를 한 점 집어먹으면서 얘기했다.
"이제 회사 만들어진 지 두 달 정도 됐는데, 준비가 안된 게 당연하죠."
"그리고 지금 시점에 준비 안된 건 괜찮아요. 근데 준비 안된 상태로 그냥 시작해버리는 게 문제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물었다.
"연구팀이 우리 싫어하겠죠?"
잠깐 정적이 흘렀다. 불판 위에서 고기 익는 소리만 들렸다.
"싫어하면 뭐 어때. 나중에 문제 안 터지는 게 더 중요하지. 안 그래요?"
"그리고 사이가 나빠질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일을 한 거지."
김 선임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웃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다들 한마디씩 한다.
"근데 팀장님은 맨날 싸우시는 것 같아요. 거의 매 회의마다 그러는 것 같은데?"
"맞아요. 싸움닭."
"그래도 이전에는 생산팀은 욕받이 었는데, 조금 달라진 것 같아요."
그 말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누군가는 고기를 더 시켰고, 누군가는 냉면을 주문했다. 회사 얘기는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 대신 각자 왜 이 회사에 왔는지, 이전 회사에서는 뭐 했는지, 연구하다가 왜 생산으로 왔는지 같은 얘기들이 오갔다. 회식은 1차로 끝났다. 길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얼마 전, 그 고기집의 같은 자리에서 나는 퇴사 후 내 진로를 격려받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팀원들 사이에 앉아 있었다. 같은 고깃집과 같은 메뉴인데 내 위치가 달라졌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어쩌면 이 회사에서 내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실무만을 생각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한 테이블에 앉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실무자였던 내가 이제는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하지만 나도 이 회사의 비임상 샘플처럼 준비되지 않은 팀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