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찬에서의 두번째 대화

같은 단어의 다른 의미. 알 것 같기도 하다.

by 영초이


키노트 강연장은 두 개의 대형 강연장을 급히 이어 붙인 형태였다. 300명은 충분히 들어올 수 있을 공간이었지만 이미 앉을자리는 없었다. 나는 맨 뒤에 가방을 내려놓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강연 화면에는 검은 화면에 흰 글씨로 주제가 쓰여있었다.


알츠하이머를 포함한 난치성 질환 치료를 위한 단백질의 복합 구조 설계


사회자는 홍세진 교수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다. 연구 성과, 기술 이전, 수상 경력. 마치 이 사람을 처음 듣는 사람이 이 자리에 없다는 걸 전제로 한 설명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긴 연사 소개는 처음 봤다. 소개가 끝나고 홍세진 교수가 무대에 올랐다. 강연은 조용히 시작됐다. 소개 감사합니다와 같은 일반적인 인사는 없었다. 그는 정면을 바라봤다. 확신이 깃든 눈이었다.


그는 10분 동안 기존 단백질 치료 전략의 실패를 정성을 다해 짚었다. 단백질이나 펩타이드의 구조는 기능과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이 결합은 실험실에서는 매우 강한 안정성을 보인다. 그렇지만 다양한 효소나 환경이 다른 체내에서 오래 버티지 못했고, 안정성을 높이면 기능을 잃었으며, 하나의 구조에 모든 환경을 맡기려 했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나는 이 대목에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슬라이드가 바뀌었다.
혈중, 혈액뇌장벽, 세포막, 세포 내부. 인체 환경이 구획별로 나뉜 구조도가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우리가 인체 환경을 pH 7.4, 체온, 0.9% NaCl 농도라는 단일 조건으로 고정해 연구해 왔다는 현실을 지적했다. 실제로는 장기마다 pH와 전하 분포, 효소 구성, 산화환원 조건이 모두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단백질만큼은 하나의 구조로 고정시키려 했을까. 그는 그 질문을 관객에게 던졌다.


화면에는 단백질 구조 변화가 나타났다. 혈액과 유사한 환경에서는 접혀 있다가, 뇌 조직 환경에서는 구조가 풀리고, 다시 세포 내부 환경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로 재배열되는 모습이었다. 그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단백질을 안정한 물질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환경에 반응하는 구조 시스템으로 설계해야 합니다.

그는 이 개념을 이렇게 불렀다. Cognitive and Adaptive Protein Architecture (CAPA). 설명은 이어졌다.

1. 혈중에서는 면역을 피하기 위한 안정 구조.
2. 혈액뇌장벽(blood-brain barrier, BBB) 근처에서는 전하가 재배열된 투과 구조.
3. 뇌 내에서는 특정 효소에 의해 일부가 절단되며 활성 전 구조.
4. 뇌신경세포 안에서는 최종 활성 구조.


체내를 이동하는 동안 구조가 4번 바뀌는 단백질이었다. 강연장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기술 설명이라기보다는 철학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이게 가능해? 라며 반쯤 화가 난 목소리를 냈고, 어떤 교수는 옆의 박사과정 학생과 이 이론을 자신의 연구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 네 단계 구조 전환 단백질이 실제로 어떻게 치료 효능을 보였는지에 대한 탄탄한 동물실험 결과였다. 데이터는 정교했고 설득력 있었다. 그럼에도 장내의 웅성거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사회자가 몇 차례 조용히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분위기는 그저 조금 낮아질 뿐이었다.


그렇게 홍세진 교수의 키노트 강연은 끝났다. 잘 짜인 실험 설계, 그 결과를 정확히 뒷받침하는 단백질 구조. 이런 사람이 진짜 스타 연구자가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수를 치면서도 내 머릿속은 다른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접힘 구조가 과연 실제로 생산이 될까?
재현은 가능할까?
만약 생산된다면, 이걸 품질관리에서는 어떻게 정의해야 하지?
안정한 제형은 어떻게 만들고, 애초에 보관은 어떻게 해야 하지?


홍세진 교수에게 묻고 싶은 건 산더미였지만, 현실적으로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키노트 발표자와 나의 테이블은 아마도 끝에서 끝일 테니까. 일단 생각을 접고 만찬 장소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피식 웃음이 나는 단어가 있었다. CAPA.

GMP에서 내가 매일 쓰는 단어였다. 홍세진 교수의 혁신적인 기술명과는 다르게, 내가 쓰는 CAPA는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작성하는 문서이다. Corrective Action and Preventive Action라고 하는 시정 및 예방 조치 문서이다. 사고의 원인을 적고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과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보고서이다. 그런데 홍세진 교수는 같은 약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 진짜 같은 단어지만 너무 다른 의미다. 내가 하는 사고 대응과는 다른 혁신적인 기술의 이름. 조금 웃기면서 씁쓸했다.






만찬자리에 옮기고 난 뒤에는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다. 이번 모임에 처음 참여하신 여러 명의 교수님과 연구원님들이 짧은 소개를 마치고 박수와 함께 자리를 앉는다. 이제 내 차례다.


"ㅁㅁ바이오로직스에서 바이오의약품 공정 개발 연구를 하는 최정남입니다. 반갑습니다."


신규 연구자들의 짧은 소개와 명함 교환이 모두 끝난 뒤에야 저녁 식사가 시작됐다. 일이나 CAPA 같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운 호텔 뷔페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일단은 먹자.


번째 접시를 가져와보니 얼떨결에 옆 자리에 홍세진 교수가 앉아있었다.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을 때,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홍세진 교수는 와인잔을 가볍게 기울이며 접시 위 음식을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강연장에서 보던 여유로운 표정과 다르지 않았다. 카메라가 없을 뿐이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강연 잘 들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웃었다.


"아, 감사합니다."


그 뒤에 이어질 말이 없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이런 자리에서 흔히 나오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질문들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접시 위 포크를 내려놓고 말했다.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CAPA 구조, 실제로 생산해 보셨나요?"


그가 쥔 와인잔이 공중에서 아주 잠깐 멈춘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를 봤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바뀌었다. 호기심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대신 조용히 물었다.


"공정 연구하시니까 이런 질문을 하시는군요."


의외로 오후에 부스에서 만났던 일을 기억하나보다. 그리고 나는 말을 이었다.


"접힘 상태가 네 번 바뀌는 구조라면, 어느 상태를 주 구조로 정의할지가 애매해집니다. 원료의약품 기준인지, 활성 전 구조 기준인지. 품질 특성으로 잡아야 할 건 접힘 비율인지 기능인... 공정 개발 쪽에서 일하다 보니 이런 궁금증이 생기네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사실 요즘 제일 많이 하는 고민이 그겁니다."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와인잔을 잡았다. 그는 접시 위에 남은 음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연구실에서는 접힘이 네 번 바뀌는 게 매력인데 막상 문서로 옮기려고 하면 갑자기 질문이 늘어나죠. 그래서 이건 몇 가지 물질이? 아니면 너무 복잡하지 않냐? 같은 질문들."


그는 가볍게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실험보다 그런 질문이 더 까다로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괜히 끼어들면 설명이 될 것 같아서였다.


"특히 재현성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요. 연구자 입장에서는 같은 구조군이라고 생각하는데 품으로 만드는 쪽에서는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겠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와인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 냅킨을 접었다.


"아직은 그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답을 못 찾았습니다."


그 말은 질문도 답도 아니었다. 그냥 혼잣말에 가까웠다.


"최정남 박사님. 의약품 공정 개발이라고 하셨죠?"

"네."

"그럼 아마 이런 부분이 저보다 더 먼저 보이시겠네요."


그는 그 말을 던지고는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


"지금은 아무래도 시끄러워서 얘기하기가 어렵네요. 회사 차리기 전에 기회를 만들어보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다음 대화를 시작할 준비가 된 사람처럼. 만찬장은 다시 소란스러워졌고 나는 잠시 CAPA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그리고 홍세진 교수의 내 정의는 스타 연구자에서 사업가로 바뀌었다.



CAPA라는 단어가 오늘만 두 번째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혁신기술과 그에 어울리는 스타연구자라...

하지만 일단 퇴근부터 하고 침대에 눕고 싶다. 오랜만에 내일 출근이 유난히 신경 쓰인다.



이전 03화학회장에서 우연한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