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타트업에 이직하게 될지 몰랐다
스타트업에서 퇴직금을 정산받은 날이다.
무려 9년을 했더라.
15년 전, 나는 인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돌이켜보면 박사과정 동안 무엇을 연구했는지는 또렷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펩타이드를 이용한 항암제 개발이었을 것이다. 분명 밤을 새워 실험했다. 결과가 나오지 않는 날들에 익숙해졌으며,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연구의 구체적인 내용보다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사실만 남았다.
이후 나는 대기업 계열사에 입사해 6년 동안 제약 공정 연구원으로 일했다. 일정은 정해져 있었고, 업무는 체계적이었다. 연구는 개인의 열정보다 시스템에 의해 움직였고, 프로젝트는 수레바퀴처럼 반복되었다. 안정적이었고, 큰 불만은 없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설명하기 어려운 권태가 찾아왔다.
매번 비슷한 일정과 회의, 이미 예상 가능한 결론들 사이에서 나는 점점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일을 하고 있었지만, 내가 왜 이 일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점점 말할 수 없게 되어갔다. 그때의 나는 회사에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었다. 생산 공정 개발 연구원이라는 직함은 길었지만, 하는 일은 명확했다. 연구실에서 나온 결과를 실제 공정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논문에서 가능하던 조건을 현장에서 재현 가능하게 만드는 일로 매일매일 성장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실패했을 때 왜 실패했는지를 연구하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아니 있었다고 믿었다. 나는 숫자와 조건, 공정 변수에 익숙했고, 이건 된다와 이건 아직 안 된다를 구분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도 그걸 알고 있었다. 회의에서 누군가 공정 이야기를 꺼내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왔다.
“이건 어떻게 보세요?”
그 질문이 나에게 돌아오는 순간, 나는 이 조직 안에서 내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튀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빠지면 안 되는 사람. 적어도 그 정도의 위치는 되어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두 살 어린 여자친구와는 결혼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있었고, 집과 대출, 일정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이제는 막연하지 않은 숫자로 다가오고 있었다. 안정이라는 단어가 추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선택지 중 하나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모든 게 잘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부터는 안심이 아니라 질문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계속 가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는 걸까. 그 질문에는 아직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막연한 갈증이 있었다.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어딘가에서는 더 큰 판에서의 나를 상상하고 있었다.
월급쟁이보다는 창업을 해보는 게 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막연한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충분한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을뿐더러 앞으로 부부가 되고 부모가 되는 걸로도 충분히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분하다는 말이 곧 만족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지금의 나는 충분히 괜찮았다. 그렇지만...
퇴근 후 집에서 TV를 켜는 건 습관 같은 일이었다. 채널을 돌리다 보면 비슷한 얼굴들이 반복해서 나왔다. 요즘 소소하게 주식에 투자에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매일 보는 건 기술과 투자에 대한 얘기뿐이다. 투자 전문가, 유명 대학 교수 출신의 성공한 창업가. 그들은 잘 나가는 회사의 혁신과 미래에 대해서 힘주어 얘기했다. 가끔씩 혹하는 소식에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화장실에 가서 매수를 해보기도 했다. 물론 결과는 전문가의 말을 듣나 마나 똑같았다. 어차피 벌거나 잃는 50 대 50의 확률 게임이라 생각하며 애써 침착해졌다. 어쩌다 번 날은 신나서 이 종목을 알려준 전문가의 말을 퇴근하자마자 다시 경청했다.
그날도 그런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다른 채널에 화면 속 잘 차려입은 남자는 또렷한 목소리로 기술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복잡한 내용을 단순한 문장으로 정리했고, 자신의 말에 조금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아쉬운 것 없어 보이는 그 여유가 남자 뒤에 황금빛의 아우라가 있다고 착각할 만큼 멋있어 보였다. 진행자는 그 남자의 말에 맞추어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자막에는 그의 소속과 직함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이다. 나는 리모컨을 멈춘 채 잠시 화면을 봤다. 그가 어떤 연구를 했는지, 그 기술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했던 건, 그가 이미 정상에 이미 도달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설명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믿는 위치에 있구나.
프로그램은 금방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고, 나는 다시 채널을 돌렸다. 그날의 나는 그 장면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정보 중 하나. 그 황금빛 아우라의 남자는 그저 스쳐 지나간 얼굴 하나였을 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스쳐 지나간 장면이 나중에 내 선택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이유가 될 거라는 걸.
스타트업에서 9 년을 일하고 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