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후에야 얘기하는 결혼 이야기

불안하지만 생활은 여유로워졌다

by 영초이

요즘 좀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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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는 임상 실패 소식에 회사는 뒤숭숭했다. 일도 많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전만큼 불안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자유로운 스타트업으로 옮긴 뒤, 내 삶의 구조가 달라진 덕분이다. 예전에는 아침에 나갈 때 여자친구는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리고 야근 후 밤늦게 귀가하면 여자친구는 이미 잘 시간이었다. 생활패턴이 맞지 않은 탓에 출퇴근 시간에 전화로도 서로의 안부를 묻기 어려웠다. 주말엔 밀린 피로를 털어내느라 약속을 미루거나 집 데이트를 하기 일쑤였다. 늘 회사 일정에 쫓겼고 머릿속은 다음 성과로만 가득 차 있었다. 그때의 나는 속도를 잃으면 곧 도태되는 것이라 믿었다. 그만큼 이전 직장은 일도 많았고 속도도 빨랐다.


지금은 오히려 회사는 더 불안하고 일은 많아졌다. 비임상은 미뤄졌고 품질 평가 항목도 다시 짜야 한다. 투자 심리와 바이오 시장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얼어붙는다. 시리즈 A 투자도 확정은 되었으나 투자금은 줄어들었다. 임상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점검해야하는 부분이 점점 많아졌다.


그런데 내게는 오히려 저녁 시간이 생겼다. 아침엔 더 일찍 나서지만 퇴근은 비교적 자유롭고 빠르다. 저녁 7시면 함께 마주 앉아 밥을 먹을 수 있고, 가끔은 일찍 퇴근하여 여자친구 회사 앞까지 민정을 데리러 간다. 유리문을 밀고 나오는 그녀를 차 안에서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이 생긴 것이다. 저녁을 먹고 다시 일하러 갈 날도 있었지만 여자친구의 얼굴을 보는 순간에는 하루 종일 팽팽했던 긴장이 비로소 풀렸다.


"요즘은 좀 사람 같다."

그녀가 툭 던진 말이 기억에 남았다. 예전엔 늘 무언가에 쫓기는 얼굴이었단다. 맞는 말이었다. 그때는 휘몰아치는 일 더미에 걱정이 앞서 있었다. 지금 회사에서 내 역할은 사뭇 다르다. 모두가 가야한다고 말할 때 나는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확인해야한다고 말했다. 무리하게 밀어붙였다가 나중에 감당 못 할 비용을 치르는 상황을 막으려 했다. 책임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차 안에서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물었다.

"요즘 일은 괜찮아?"


나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녀는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하고 싶어했던 일이었잖아. 똥고집 피워서 만든 약인데 나중에 얼마나 잘 나오겠어? 나는 벌써 기대되는데."


그 낙천적인 말 한마디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요즘 좀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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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는 부쩍 결혼 이야기를 많이 한다. 주말 저녁 마트에서 산 식재료로 정성껏 저녁을 차려 먹고 나면 식탁 앞에 앉아 작은 태블릿 하나를 사이에 두고 머리를 맞댔다.

"오빠, 여기 봐봐. 이 조명 예쁘지 않아? 우리 나중에 식탁 위에 이거 달면 분위기 진짜 좋겠다."

"따뜻한 색감이라 좋은데? 거실에는 형광등 보다는 이런 따뜻한 조명을 두고 싶어."


그녀가 보여주는 인테리어 사진들 속에는 우리가 함께할 미래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예전 같으면 승진이나 연봉 같은 전제를 달았겠지만, 이제 우리는 그런 조건부 행복을 말하지 않는다.

"집은 회사랑 너무 멀지 않은 곳이면 좋겠어. 오빠 퇴근하고 바로 와서 나랑 산책할 수 있게. 큰 공원은 아니어도 단지 안에 작은 나무들만 있어도 충분해."

"응, 너무 욕심내지 말자. 대신 침대는 제일 좋은 걸로 사야 해."


그녀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채울 때마다 낮 동안 느꼈던 날 선 긴장감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지금 다니는 회사 회의보다 식탁 조명 하나를 고르며 짓는 그녀의 미소가 훨씬 더 현실적이고 단단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우리 집 생기면 거실에는 큰 테이블을 두자. 거기서 오빠는 일하고, 나는 책 읽고. 우리 지금처럼 저녁은 꼭 같이 먹는 거야."

"나중에 우리 결혼식은 작게 하자. 정말 우리 축하해줄 사람들만 모여서 맛있는 거 먹는 거야. 남는 돈은 우리 여행 가는 데 보태고. 차라리 신혼여행을 더 길게가자."


미래를 그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녀는 우리가 함께 만드는 삶이 실패할 리 없다고 확실하는 듯 보였다.

"집은 조금 작아도 괜찮아. 대신 채광이 잘 들어서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날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 우리 지금 모은 걸로 충분히 시작할 수 있잖아."


그녀의 확신 어린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회사 일들이 아주 작은 소동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직 안정적이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산책을 하고 가구 카탈로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회사에서는 수많은 변수와 싸우며 방향을 고민하지만, 적어도 내 곁의 이 사람과 함께 사는 것 만큼은 지키고 싶다는 확신이 들었다. 창밖으로는 차가운 밤공기가 흐르고 뉴스는 연일 불안한 임상 실패와 폭락하는 경제 지표를 쏟아냈지만, 노란 식탁 조명 아래의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하고 평온했다. 회사 일과 같은 불안함에 휩쓸려 여자친구를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끔씩 던지는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된다.

"사고 안나게 하려고 이것저것 해보는거. 나는 그게 오빠가 진짜 일을 잘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지금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내일 저녁에도 이곳에서 함께 밥을 먹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함께 먹는 저녁이 늘어난 만큼 우리는 예전보다 훨씬 단단하게 서로를 붙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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