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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by 카이

명절 스트레스? 난 그런 거 잘 모른다.

내가 명절에 하는 일이라야 여느 남정네들처럼 먹고, 자고, 애들 보는 것이 전부이니 스트레스받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일 것이다. 장시간 운전하는 것도 평소엔 운전을 잘하지 않으니 오히려 이럴 때 한 번씩 운전하면서 요리조리 끼어들기도 하고, 차가 많지 않으면 과속도 하면서 나름 스릴도 느끼고, 게임하듯 즐기니 전혀 힘들지 않다. 이에 더해 예쁜 마누라가 옆에서 계속하여 재잘거리니, 함께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보면 지루 할 순간도 없이 목적지에 도착이다.


그저 명절에 하는 고생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자들의 몫이다. 그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집안 여자들 간 사이가 좋지 않다면 그건 정말 생지옥이다. 즐거워야 할 명절에 서로 간의 기싸움으로 온 가족의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버리게 된다. 물론 우리 집과는 상관없는 얘기다.


이해심 많고 자식들을 아끼시는 어머니와 어른을 공경할 줄 아는 마누라를 둔 덕에 우리 집에서 고부간의 갈등은 딴 세상 얘기다.

어머니는 명절이든 아니든 가족들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혼자 아침상을 준비하신다. 며느리나 딸은 아침 준비가 끝나면 기상이다. 아내는 그런 시어머니에게 항상 감사해하며 수시로 통화하고, 내가 바빠 집에 갈 수 없을 때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1주일씩 집에 머물다 올 때도 있을 만큼 살갑게 시어머니를 대한다. 두 여자의 영상 통화하는 모습을 누군가 본다면 다들 깜짝 놀랄 것이다. 고부간이라 쉽게 생각하지 못할 만큼 다정해 보이기 때문이다.(사랑한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하는 사이다.)


언제나 어머니는 내게 처갓집 어른들과 아내에게 잘해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아내는 내게 어머니께 전화도 자주 하고 평소에 잘 좀 하라고 바가지다. 난 어머니 때문에 처갓집에 한 번이라도 더 가게 되고, 아내 때문에 어머니한테 전화라도 한 번씩 더 하게 된다. 여행 말곤 어디 다니는 거, 전화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기쁜 마음으로 두 여자의 말은 참 잘 듣는다. 나야 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다음 명절부터는 차례고 뭐고 다 그만두고 가족끼리 여행을 다니기로 했다. 어머니는 애써 내 눈치를 보시지만, 평소 유교의 형식주의를 계속하여 비판해 온 내게 명절에 차례 지내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도 없으니 문제 될 것이 없다. 지금까지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서운해하실까 하는 어머니와 누님, 아내의 걱정 때문에 해온 것이니 만큼 이번 기회에 확실히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래도 돌아가신 분들한테는 잘해야 한다는데 차례 안 지내도 될까?”

“일 년에 한두 번 음식 해놓고 절하는 게 잘하는 게 아니라, 평소에 아버지 사진 보며 얘기하고 항상 기억하려 하는 것이 잘하는 거예요.”


앞으로 아버지 제삿날엔 가족끼리 집에 모여 맛있는 음식과 함께 아이들과 할아버지를 추억하고, 명절엔 가족 여행을 가기로 그렇게 정했다.


사람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그만이지만, 혹 일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아버지의 영이 세상에 남아 우리 가족을 지켜보신다 하더라도 괜찮다. 아버지도 어깨가 아파 팔도 잘 못 움직이시는 어머니와 그리 예뻐하셨던 며느리가 쪼그려 앉아 몇 시간씩 허리도 못 펴고 만들어낸 음식을 드시는 것보다는, 좋은 곳에서 밝게 웃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하는 가족들을 보시는 게 백배는 더 기쁘실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제 명절이라 음식 준비한다고 집에서만 콩닥거리지 말고, 여기저기 좋은 곳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겠다.


이해심 많은 어머니, 착한 아내, 말 안 듣는 아들, 애교 쟁이 딸, 이 모든 것이 너무나 감사한 나까지, 이렇게 다섯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하는 최고의 예우일 것이다.

흐뭇하게 웃고 계신 아버지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이 아버지도 내 생각이 맞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우리 가족 모두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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