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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없다는 것

캘리에세이

by 카이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지만, 눈앞에 놓인 빈 노트와 손에 쥔 펜은 정적만을 담고 있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있고, 떠오르는 생각조차 없다. 나는 나침반 없이 떠다니는 작은 배처럼 방향을 잃은 채, 잔잔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바다 위를 표류한다. 파도는 낮게 일렁이고, 바람은 어디로 불어갈지 모른다. 이 고요 속에 나는 홀로 있다.


그렇게 한참을 떠돌다 보니 머릿속에서 무언가 반짝하고 지나간다. 지금의 상태를 주제로 새로운 글을 써보는 건 어떨까?


정해진 주제가 없다는 건 또 다른 의미로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마치 길이 없는 숲 속에서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탐험가처럼, 어느 방향으로든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 그의 눈앞엔 낯선 풍경들이 펼쳐지고, 발밑의 낙엽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새로움의 시작을 알린다.


그러나 그 선택의 무게 또한 결코 작진 않을 것이다. 이 길이 맞을까?,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겨야 할까? 그런 의문들 속에서 주저하겠지만, 괜찮다. 이 모순적인 상태야말로 창작의 본질일 테니까.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전 아무것도 없는 순간의 고요, 그 고요 속에 숨어 있는 작은 이야기들을 잡아내는 것.


나는 다시 펜을 든다. "아무것도 없다"라고 생각했던 내 머릿속에서 아주 작은 이야기의 씨앗이 싹트는 것을 느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둘러싼 일상의 풍경, 내 안에서 울리는 마음의 소리들이 주제가 되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주제가 없다는 건, 사실 모든 것이 주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방향을 잃었다고 느낄 때, 나는 내가 가진 바다의 넓이를 잊지 않으려 한다. 내 앞에 펼쳐진 바다는 끝없는 이야기의 물결을 품고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창작의 가장 큰 축복이다. 주제를 정하지 않은 지금 이 순간조차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문이 열리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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