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단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르긴 몰라도 어떤 부분에서 육감적인 센스가 부족한 사람들이란 걸 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세상이, 또 내 꼬락서니가 내 뭄뚱이로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거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든 알고 싶어서 책을 찾게 되는 거지. 자연스럽게 읽은 것들을 뽐내고 싶은 마음이 따라온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고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꽤 자세히 알게 되었고 내 말투가 진지해질 때에 알아챈다 '아하, 잘난 체 병이 도지려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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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기 전에 해당 아이디어에 관한 책을 읽으면 방해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생각이 계속 거기에 매이면서 뭔가 내가 학습해서 알게 된 개념적인 것들을 그림으로 뽐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림이 글의 충실한 하인 역할을 하고는 했다. 나는 나의 착각을 깨닫지 못하고 아이디어가 없는 그림을 그리면 그림이 글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녀석으로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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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이디어가 없는 그림, 몸으로 그린 그림이 매력적일 수 있다면 정말 차원 높은 예술 아니겠는가?
아들이 놀이를 할 때 보면 기가 막힌다.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무한 반복하는데 눈에서 순간의 행복이 쏟아져내린다. 어른들이 어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고 어린이 같이 있는 그대로 빛나는 순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인생이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생기 넘치고 행복하겠는가. 어린이들의 활기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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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근데 나는 나름 아름다운 이상주의자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찌르면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다. 금방 내 깜냥을 알아차리거든.
나는 아이디어 없이는 시체다.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너무나 재밌다.
그리고 그 이야기라는 경계선 안에서 그려내는 그림들이 자유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 있어서 최근에 터득하게 된 내 비밀 독서 스킬을 아무도 없는 이 새벽 혼잣말로 나에게 공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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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발전 과정에서는 원하는 대로 읽되 이야기의 첫 구절이 시작되려는 순간 모든 책을 덮는 스킬이다. 그냥 책만 덮는 게 아니라 배운 지식들 의식적으로 다 덮어버리는 거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읽고 안 배운 것처럼 시간을 되돌려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내 속에서 온갖 생각의 순번들이 다 섞여버리고 1번이 10번 뒤로 가고 5번이 3번 앞으로 오면서 마구마구 자유로워지더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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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금은 '이것이구나!' 하지만 또 어느 순간, '어 이게 아니네!' 할 것이다. 그럼 '젠장, 또 잘못짚었네!' 할게 아니라 '오구오구 우리 영글이 영글어가고 있구나' 하며 스스로 다독여줘야 한다. 그때가 진짜 잘난 체를 해야 되는 시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