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gi Seo Nov 07. 2018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아는 것만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란

이전 회사의 매거진 필진으로 활동할 당시 매거진에 실린 글 중에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통해 에세이를 쓴 글이 있다. 지금 다시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얼굴까지 시뻘거지기전에 창을 닫아버린다. 왜냐하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긴 게 아니라, 아마추어에게는 인생은 길고 예술은 짧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대해서 문외한이었고 지금도 내공을 표현하기가 부끄러운 본인이 우연찮게 얻은 기회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선보인 글이었기에 얼마나 부족한 지 다시 안 봐도 뻔하다.

6펜스


그리고 제목의 문구는 요즘 서점가에서 잘 나가는 책 중에 하나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 책의 저자는 홍익대 디자인과에 4년 재수 끝에 입학하였는데 정작 미술에 입문하였을 때,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리고 전공과 관계없는 일을 이것저것 하다가 회사 생활도 자신과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몇 년간 백수로 지내다가 또 어떠한 일을 시작하고 지금에 와서 상동의 제목과 같은 책을 발간하고 대박 냈다(지금 그 책의 노이즈 마케팅 일환으로 제목을 언급한 게 아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2946316).



그 저자는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끝내 해보고 자기 적성과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낸 걸 보면 일단 후회할만한 삶을 살지는 않았다.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죽는 이들도 많을 테니 말이다. '제7의 감각'이라는 책을 참조해서 필자가 긁적인 글(https://brunch.co.kr/@younggiseo/102)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잘할 지에 대해 목표를 먼저 세우기 전에 그것들에 대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부터 살펴보라고 언급하였다.



목표를 세우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먼저 어느 것이라도 시작해서 부딪혀본 다음에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수정하는 전략으로 사는 게 그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라고 제목을 지은 저자의 생각은 책의 내용을 안 봐도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는 뻔할 뻔자다. 세상을 대하는 순서 자체가 뒤바뀐 게 당사자의 잘못이라면 잘못인데, 사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대로라면 금수저든 흙수저였든 누구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이 글에서 내가 한 번 더 환기시키고자 한다.


성공이라는 기준은 누가 세워줬는가?


이것부터 교육의 시작이 잘못되었다. 성공은 일단 줄을 세웠을 때 맨 앞에 있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암묵적으로 주입하여온 학교 교육이 사실 과거도 미래에도 이 시대의 모든 청년이 겪을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패착이다. 현대 미디어나 저작에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나 수행가들조차도 해외든 국내든 이러한 고정관념이 없이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선전을 하고 있지 아니한 사람들은 없다. 미디어에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고 자신만만하게 의견을 내놓는 사람들이 혹은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는 공인들이 성공한 사람들의 부류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제아무리 돈을 어디든 뿌리고 싶은 대로 뿌릴 수 있는 재력가이며 대중의 존경을 받는 유명인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그들의 기준이 아닌 자본주의라는 사회(어차피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공산주의 국가들도 한 둘 자본주의에 편입 하는 중이므로)에서 통칭하는 '성공'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인생을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자신에게는 그럴듯한 이미지로 포장된 성공의 이면일 뿐이지 그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삶이 만족스러운가는 제삼자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어제 부동산 투자에 대한 한 프로그램을 보면서 패널로 나와서 열심히 떠드는 부동산 전문가들의 정보에 귀가 솔깃하였다. 투자 정보를 저렇게 바싹 알고 있으면 자본만 있으면 부자 되기는 따놓은 당상 아닌가. 그런데 한 가지 의뭉스러운 것은 전문가들의 입에 발린 투자담에 성공해서 남은 여생을 돈 걱정 없이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과연 행복할까? 자기 집하나 떡하니 있고 그 아파트 거실에서 가족들과 여한 없이 웃고 떠든다 한들 과연 그 행복이 몇 년이나 지속될까? 서울에 아파트 열 채, 지방에 오피스텔 다섯 채, 해외에 별장 한 채 있어서 죽기 전에 여한 없이 다 둘러본다면 과연 나는 평생 후회 없이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주택부자들, 평균 703채 집 갖고 있다. -오마이뉴스



그런 상대적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행복감은 잠시일 뿐이다라고 나뿐만 아니라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까지도 귀가 따갑도록 얘기한다. 하지만 그런 잠시 동안의 상대적 우월감을 가장 느껴보고 싶어 하는 서민들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며 이 대한민국의 교육이 그런 영장류를 키우는 데 가장 최적화된 행태가 아닐까? 그러니 돈을 평생 먹고사는데 지장 없을만큼 벌어도 자본주의 탐욕에 가장 쉽게 현혹되고 또 돈을 끌어모으는데 혈안인 사람들이 많은 나라 중 하나가 아닐까? 비트코인, 로또 등 투기성 투자의 수요가 많은 국가일수록 사실 그 나라 경제가 팍팍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일확천금으로 횡재하고 싶은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시험이라는 잣대로 줄 세우는 입시의 부조리를 겪을 바에 사회에 나가서 먼저 돈을 어떻게 벌 수 있는지부터 보고 세상에 먼저 부딪히게 만드는 교육이 절실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물론 나라고 이러한 말을 할 자격은 안되지만, 여력이 되었다면 대한민국이 아닌 핀란드로 이민을 가서 거기서 정착하고 싶다는 것이 대한민국인로서 솔직한 심정이다. 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도 그리고 학부모와 선생이 세상을 바라보게끔 만드는 교육관도 사회에 나가서 결국에는 누군가를 짓밟지 않으면 올라설 수 없다는 식이라고 조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대물림 교육이 현실이고 현시대 자본주의의 교육이다.



마케팅에서 흔히들 인용하는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라고 있다. 사회가 발달하여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될수록 상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는 이론이다. 하지만 가장 말단의 성욕이나 수면욕의 하위 욕구들은 자고 나면 또 드는 것들이므로, 이것들이 매일같이 충족되면 단계별로 하나씩 상위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충족하고 싶은 욕구로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영화 '완벽한 타인'을 보노라면 설정한 캐릭터들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소외된 인간관계의 욕망을 실질 사회에서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려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작, 이탈리아 영화 '완벽한 타인'


사회라는 그러니깐 내가 세운 기준이 아닌 자본주의에서 비롯되어 대한민국이라는 하나의 사회에서 형성된 기준에 부합하기 위해 애쓴 욕망의 표출이 그 당사자가 세운 기준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은 말단부터 억지로 밀봉해둔 본인의 욕구는 언젠가는 비집고 나오는 현실이 대한민국(미국 포함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들)의 현주소이다. 물론 영화의 내용이 현실을 100% 묘사한 거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더하면 더했지 덜 곡해하지는 않았을 것임에 99% 동조한다.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되지 않겠는가...


왜 남자만 칼을 뽑아야 하는가? 병신, 머저리 대가리(Head, 가장 상위의 권력을 지닌 사람)들이 득실한 대한민국에서 제구실도 못하는 남자들이면 한 번씩 내뱉는 말 아닌가? 결론을 뽑으려다 갑자기 감정에의 호소하는 삼천포로 빠졌다. 인생에서 자신을 평가해줄 수 있는 곳으로 사회는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사회라는 구속된 틀이 없다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하는 비교가 불가하고, 그 틀에 의해 상대적으로 평가가 가능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방향을 잡고 변화를 시도해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은 본인이 뽑아야 한다.



칼자루의 종류는 애초에 누구나 다르게 주어진다 하더라도 쳐든 칼을 남들 눈치 보며 휘두르거나 다시 쑤셔 넣을 필요가 없다. 뽑은 칼로 무를 썰든지 예술을 하든지 행위에 대한 책임은 본인에게 있고 그러한 행위의 가치는 굳이 사회에서 재단해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그렇게 살지 않았었지만 후대에서 뒤늦게 평가되어 자신의 삶을 예술가로서 인정을 받은 사람도 있으니, 꼭 지금 현재의 세상에서 갈구하는 '성공'만을 바랄 필요도 없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