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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Dec 10. 2015

공부란 구속의 연속이다.

삶은 부조리하고 철학은 밖에서 해야 한다.

  뇌가 가장 무의식적일  이루어지는 생각들이 궁극적으로 인간 본연의 생각이다. 우리는 일을 통해 궁극적으로 가장 자기답게   있다. 우리가 이미 말을   있는 것들은 우리 생각을 가두어서 보이기 위한 수단의 표출이므로 말을 하는 순간, 본래의 의미는 퇴색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모든 학문과 철학은 이미 글로 쓰이고 내뱉어진 순간  본래의 진정성은 소실되고 우리는 공허한 껍데기만을 가지고 공부라는 형식에 다시 구속시킨다.


  얼마나 부차한 일인가? 이론을 적재하기위한 공부란 하등 쓸모가 없다. 지혜는 이미 우리의 행동과 무의식적인 발로에서 뻗어 나오는데 이것을 표기된 형식으로 탈바꿈하여 다시 강제로 두뇌에 세뇌시키는 작업이  천년 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규모의 지식으로 인해 인간은 학문의 상아탑에서 끊임없는  숨을 내쉰다.


  인간은 교양과 상식이 아닌 앞서 말한 규모의 암기용 지식으로 하여금 사회에서 차등시킬 수 있는 수단의 형태로 계급과 신분의 상하를 나눈다. 디오게네스가 알렉산더가 앞에 왔을 때, 당당하게 햇빛 좀 쐬게 나온나라고 말할 수 있었던 삶 앞에서의 진정성. 이는 근원적인 철학적 뿌리, 그게 바로 철학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탁상공론이나 하는 학문이 아니라 머릿속의 도덕적 철학과 세상 밖의 도덕적 철학은 하나다라는 말이다. 철학, 서양 근대 모든 학문의 뿌리가 바로 이 철학과 종교에서 갈라져 나왔으니 우리가 지금 하는 공부의 뿌리는 머릿속이 아니라 삶이라는 터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왜 나는 계속 학문의 굴레에 얽매이는가? 나 자신의 콤플렉스를 무마시키기 위함인가? 좀 더 출세하기 위한 수단을 다지기 위해서인가?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서인가? 미인과 결혼하고 싶어서인가? 명예로운 학력과 평판을 가지고 싶어서인가? 부모님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서인가? 이것이 과연 삶을 사는데 나에게 커다란 의미를 주고 자신의 행복과 가치관에 부합되는가?


  일의 보람을 느끼며 깨끗이 비워진 마음으로 고전을 수렴하고 자녀들이 컸을  함께 옥스포드 대학에 가서 떠들며 교수들과 논쟁을 불사하며 구차한 지식을 발화해서 결국 내가 원하는 비평을 써내려가며   아닌가?


  공부한다는 것은 인류가 지금까지 사고한 방식으로 구속시킨다는 의미다. 공부한다고  자신의 가치관은 바뀔지 몰라도 인생을 사는데 궁극적인 의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깨달음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나오며 자신의 행동을 보고 그것의 옳고 그름을 현실을 통해 판단할  있다. 현실로부터 경험한 산물의 축척이 지혜로 불린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서 현재 이루어진 구조를 보고 세상의 이치를 따질  아니라 그것들을 파생시킨 근원들을 들춰내야 한다.


  내가 만약 십여 년 뒤에 옥스퍼드 대학 교수들과 한 자리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분석철학론과 카뮈가 논한 삶의 부조리에 대해 활발한 논쟁을 벌인다면 이것이 내 삶에서 얼마나 크나큰 만족이 되겠는가? 그리고 내 이름으로 세상에 대한 비평론을 출간한다면 이것은 나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되겠는가? 비록 그것이 삶의 구속이라는 나의 명제를 깨뜨릴 수 있는 또 하나의 구속감을 세상에 심어주기 위한 의도일지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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