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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Apr 28. 2020

속독의 맹점과 모국어의 중요성

문해력은 스키마(schema)의 양에 비례한다





주말에 서점에 들러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을 보고 있었다.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고급 가죽 소재의 카우치(소파)에 앉아서 책의 이야기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서너 살로 보이는 아이가 엄마 옆에서 봉지에 든 사탕을 꼼지락거리는 게 보였다.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라는 계명*에 귀 기울려고 하는 순간순간마다 그 아가의 모습에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 오웰 자신도 이 책을 “땀흘려 쓴 유일한 작품이며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완전한 전체로 융합하려고 시도한 첫 번째 작품”이라고 애정을 표했다고 함


이미 책을 일독한 경험이 있어서 속독을 하려는 참이었으나, 그 아이가 엄마에게 ‘다른 사탕 사줘’라고 징징거리는 바람에 결국 내 눈의 자각과 두뇌의 자각은 따로 놀았다. 아따 애의 목청이 얼마나 걸걸하던지 그 나이에 엄마를 부르는 목소리가 ‘내일은 미스터 트롯’의 본선에서 본 트로트 영재들 못지않았다. 그 보호자는 자제를 달래기는커녕 그 넓은 대형서점의 맨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애기의 곡성을 손님들의 이목에 주목받게끔 되려 외면했다. 목이 얼마나 크게 쉰 채로 엄마를 타령하던지 그 나이에 득음을 할 것만 같았다.



한국은 필자의 아동기 시절보다 오래전에 과외금지로 사행성 학원가의 성행이 주춤했었다고 한다. 속독법을 가르치는 학원은 그 시기에 유행할 수 있는 학원 중 하나였다는데, 어떤 저자의 책에서 본인은 속독을 배우러 갔지만 실제로 속독 학원에서는 기억법을 가르치면서 우회적으로 영어 문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 저자의 어머니는 욕은 할지언정 법을 어길 자신은 없어서 저자를 속독 학원에 보냈단다. 속독 학원은 과외 단속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이 글의 필자는 그런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몰래 영어교육을 시키려는 한국 부모들의 열의에 대한 딴지는 잠깐 묻어두고 먼저 속독의 맹점에 대해서 말하겠다.



속독은 말 그대로 빨리 읽는 것이다. 전제요건으로 이해도 가능해야 한다. 본인도 예전에 어떤 목사 출신이 쓴 속독법의 책을 사서 거기의 훈련법을 따라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눈알이 총알만큼 빨리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글의 맥락(소설로 치면 줄거리의 흐름)은 놓치게 되고 결국엔 어떠한 책의 페이지도 매직 아이 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보통 대다수의 독자들의 이해 수준이다. 성급한 일반화이지만 어릴 적부터 높은 문해력을 갖춘 극소수라도 처음 보는 책을 속독한다고 이해까지 동시에 될리는 만무하다.


“오, 캡틴 마이 캡틴!”,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와 같이 ‘굿 윌 헌팅’에서도 미성숙한 소년의 선장 역을 맡은 로빈 윌리암스와 사진 속독의 재능을 가진 그 소년 윌(맷 데이먼)


행간에 ‘굿 윌 헌팅’의 주인공역을 맡았던 맷 데이먼처럼 태어날 때부터 ‘포토그래프(사진) 리딩’이 가능하다는 사람이 있다고 어느 기억법 책에서 본 거 같기는 하다. 맷 데이먼이 하버드 졸업 직전에 중퇴한 수재라는 실제 이미지는 그의 영화 속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영화의 시나리오는 친구 밴 애플렉과 함께 수 백 편의 성공한 기존 시나리오를 읽고 분석한 끝에 그 패턴을 그대로 옮겨와서 재편집한 이야기일 뿐이다. 약간 옆길로 샜는데, 우리 인간의 잠재능력에 사진 찍듯이 저장시키는 독해능력이 본래 존재하지만 자라면서 사라진다는 우뇌 사고능력의 가설에 대해 수긍하는 바도 아니다.



속독 테스트가 읽는 이 모두에게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한다는 평가 자체가 속독의 맹점이다(대니얼 윌링햄, 2019). 사람마다 어떠한 글을 읽기 전에 이미 갖춘 지식의 양과 이해 수준(문해력)은 천차만별이다. 주어진 글이 아무리 평이한 수준이라고 하더라도 읽는 이의 배경지식과 글의 내용과 관련된 사전 지식의 조합으로 이미 두뇌에 구축되어 있는 틀(스키마)이 제각각인데 속독의 결과(분당 읽은 단어수와 이해 평가 테스트의 점수)가 절대적인 지표로 각 개인의 독서 수준으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한 때 대한민국에서 이름값이 가장 높았던 코미디언 대부 주병진이 진행하는 한 쇼프로에 속독 영재가 나와서 자신이 처음 보는 글을 순식 간에 읽고 이해력 테스트에서 전부 맞히는 속독 능력을 본 적이 있다. 시청자는 그것을 통해 본질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얻어야 하는가?


내 새끼도 저러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들의 자식 사랑이 전 세계 어딜 가나 다르겠냐만은 자야 할 시간대에 저런 아동이 나와서 시청자의 특히 부모의 가장 큰 욕망 중 하나를 자극하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재능의 이면을 간과하고 가뜩이나 높은 교육열을 가진 대한민국에 애가 아닌 부모의 교육열을 활활 자극시키는 꼴이라고 생각한다. 그 영재가 만약 고등교육을 이미 넘어선 어른의 수준과 비슷한 스키마(책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기반 지식)의 소유자라면 그 당시 그런 프로그램에 나와서 자신의 재능을 선보일 게 아니라, 국가의 싱크탱크(엘리트 인재들이 모인) 기관에 스카우트되어서 최전선 지식의 활용에 이바지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해뒀는데 연결고리가 많아서 비교적 쉽게 되는 거죠. 결국 근본이 되는 공부, 공부의 기초체력을 갖추는 게 중요해요.” 근래 인터뷰한 IQ210의 김웅용씨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 달리 그런 특출한 인재의 성장은 처음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나서 세간의 관심이 시들해지면 향후에 그 영재가 대중의 기대에 못 미친 모습을 언론에 비춰 버리는 (‘어릴 적 그 똑똑한 수재가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이며, 오히려 평범한 대학을 나왔습니다.’) 사례(대표적으로 김웅용 씨 사례)들만 보여왔다.



반면에 일본의 문학 작가 오에겐자 부로는 어릴 적에 미국의 노벨문학상 작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만을 두고두고 보고 외우다시피 하다가 청소년 때 그 소설의 영문판을 보았단다. 그때 그는 이미 머릿속에 일본어로 그 소설의 내용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되어 있어서 영어만을 보고도 소설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었고 영어도 그렇게 배웠다고 한다. 수십 년 후 그의 소설 ‘만연원년의 풋볼’로 그도 일본을 대표하는 노벨 문학상 작가가 되었다.


한국은 어찌 보면 일본을 비하하는데 선동되기보다 오히려 일본에게 배워야 할 상식이 있는 나라이기도하다. 영어에 대한 인식은 일본과 견주어서 누가 나은지 모르겠지만, (그 나라도 영어에 대한 콤플렉스는 한국 못지않고 영어를 원어민처럼 제대로 구사하든 못하든 한국만큼 일단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적어도 앞서 말한 속독의 맹점과 같은 ‘빨리빨리’ 구호의 속성주의 경향은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국민의 일상 깊숙이 젖어든 것 같다.


동남아시아의 세 국가가 비교한 60년대부터의 한국의 성장률
2008년 미국의 월가 붕괴로 인한 세계 경제 후퇴기에 들어서서도 성장가도를 달리는 중국의 경제 성장률



필자는 이전 편에서 말한 ‘포토 리딩’이라는 미국인 저자가 쓴 책(그것도 원서까지 구매를 하며)을 접한 이후로 대학시절부터 부리나케 책을 읽는 데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장르는 영미문학부터 소설, 사회, 인문학, 심지어 철학까지 마치 ‘굿 윌 헌팅’의 주인공 윌처럼 사진 찍듯이 책을 본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포토 리딩 원서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때 그렇게 훑어보기만 한 책들의 지식은 나의 스키마로 과연 쌓였는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맞다, 원서의 표지가 이렇게 생긴 책이었다. 다음 편에는 언제 포토리딩을 시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영어원서도 한국인이 속독을 해도 남는게 있는지에 대해서 필자의 의견을 피력하겠다.


만약 당시에 행간을 이해하며 읽었었던 소설과 문학만을 제외하곤 꽤나 수준 높은 서적들이 정말 나의 뇌리에 사진 찍히듯이 무의식적으로 저장되어 있다면, 나는 지금 한국이 아니라 영국의 채텀 하우스(Chatham House)** 정도의 엘리트 집합소에 싱크탱크로 재직하고 있다고 장담한다. 올해 이코노미스트(Economist)의 ‘The World in 2020’ 매거진에 ‘Towards a sustainable world order’와 같은 칼럼을 기고했을 정도의 브레인이 되어서 말이다. 2020년을 기점으로 폐쇄적인 채텀 하우스를 대체할 민간의 엘리트 집단 출현이나 지역 기업의 싱크탱크의 약진을 암시하는 결론을 내리면서 말이다. 하지만 필자는 어제 실제 이 논설을 보면서 가능한 최소한의 의미 번역과 동시에 머릿속에 암기되어 있는 원어민이 영작 시에 많이 쓰는 구문의 용법이 적용되는지 한 문장씩 확인하면서, 그 한 문단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이 번역글을 곧 필자의 브런치를 통해 게재하겠다.



만약 본인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어제처럼 영문 메시지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여 번역한 한국말을 다시 영어다운 구조로 풀어내는 연습을 차근차근하였다면 또 장담컨대 필자는 영국의 채텀 하우스의 수뇌부에서 일하고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필자의 어조가 너무 진정성 있게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주석|

*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의 공산주의 사회를 풍자화한 소설인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에 등장하는 존슨 씨 농장의 동물들이 인간들을 몰아내고 반란에 성공하자 인간을 뜻하는 두 다리와 자기네들을 뜻하는 네 다리를 상징해서 부르는 구호로 스탈린이 지배한 소련(소비에트 연합국의 줄임말로 지금의 러시아) 공산국 시대에 자본주의 사상을 배격한 계명에 비유됨.


** Chatham House: 왕립 국제 문제 연구소 또는 채텀 하우스는 영국의 싱크탱크이다. 1920년 창설되었으며, 본부는 런던에 위치하고 있다. (발췌-한국어 위키백과)



참조|

대니얼 윌링햄. 정옥년, 이지혜 역. (2019). 리딩 마인드 : 우리는 어떻게 글을 읽을 것인가. 서울: 학이시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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