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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Mar 2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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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동안 의사생활을 해오면서... 사실은 의사생활을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럼 30년 동안 한 의사생활이 후회스러웠다는건가? 유튜브 광고 영상에서 본 한 여의사의 인터뷰였다. 사회적 통념 중 하나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더라도 굿굿이 한다면 결국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거다. '에이트'에서 이지성 작가의 에피소드다. 그는 원래 학교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렇데 한 시골의 학교 선생님으로 부임한 이후, 그 일이 그렇게 하기 싫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하루 일과 중 절반은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고, 마치면 남아서 잔일 거리가 많아서 그것들을 집에까지 가져와서 하고, 자신이 기대했던 학교 선생님의 일과와는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학교 선생님의 일을 그만둘 수 없었던 까닭은 많은 빚이 있어서 그것을 청산하려면 하릴없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도 꿋꿋이 버티면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또한 그것을 사회적 통념이라고 여겼고 작가로서 성공한 이후에 발간한 책 '에이트'에서 독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중 하나로 '하기 싫은 일이라도 꿋꿋이 버티면 언젠가 보상을 받는다'는 사회적 통념을 깨라는 거였다.



그가 예전에 '두드림'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작가 황석영 앞에서 '자신은 이삼십  여성 팬층으로 자신이 출판한 책이 현재까지도 시중에서 베스트셀러로 많이 팔리고 있다.'... 뭐랄까? 리얼리스트(?)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그가 '에이트' 출간한 무렵에 A부터 Z까지 비판하는 댓글을 인터넷 서적 사이트에 달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쓸모없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도 배울   가지는 있다는 공자의 격언처럼 그에게서도 배운 메시지 하나가 있었던 거다.



이전에 우리나라에 '현각'이라는 외국인 스님 한 명이 꽤 유명했었는데, 그는 한국의 대승불교에서 어느 유명한 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서 회계사인가 연봉이 높은 자신의 현업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귀화했다. 지금도 아마 살아 계시고, 대승 불교계에서는 꽤나 유명할 것이다. 필자가 병장 시절, 연대 보일러병(그래도 해병대였다.)으로 아침에 군무원 내무실에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켜면 그분이 나와서 한국말로 가르침을 전하는 불교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는 하버드대인가, 예일대인가, 케임브리지대인가... 여하튼 입이 쩍 벌어지는 명판의 세계 유수의 대학을 졸업한 수재인 것으로 안다. 또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도 예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그의 집안 모두 의사 출신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의사 부모님 밑에서 태어난 세 명의 형제 중 두 명의 형제들 역시 하버드대인가, 예일대인가, 케임브리지대인가, 옥스퍼드대인가... 여하튼 그 현각 스님과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의사가 다 되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꿋꿋이 버티다가 둘 다 자살했다는 일화로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사람은 겉으로 할 수 있는 거짓말로 타인을 속일지는 몰라도 내면으로 하는 거짓말로 결코 자신을 속이지는 못한다. 자신을 속인 인생은 결코 자신에게 이로운 보상이란 없다. 가족 때문에? 생계 때문에? 사회가 이 모양이라서? 그러면 계속 그 모양으로 버틸 것인가? 사회에서 자신에게 보상해주는 것은 열심히 일한 당신의 노고일지 몰라도 결코 자신이 자신에게 매기는 보상만큼 값진 것은 없다. 타인의 기대와 시선에 기대어 자신이 살고 싶은 인생을 포기하는 것만큼 미련한 것은 없다.



필자는 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면 아버지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구나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속이  탄다. 아버지는 이제 곧 퇴임할 문재인 대통령과 한 동네 건너서 초등학교를 다녔었다. 당시에 북한 지역에서 피난민의 한 자식으로 태어난 문재인 대통령은 그 동네의 초등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부산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왔고,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했다. 한편 나의 아버지는 어릴 적에 동네 할아버지들이 두는 바둑판에서 할아버지들에게도 훈수를 둘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고 큰삼촌이 명절 때 한 번씩 얘기해주시곤 했다. 그 말은 즉슨 아버지의 두뇌는 보통이 아니었다는 거, 하물면 그 할아버지들이 '우리 OO 이는 말을 그렇게 잘해서 나중에 변호사가 될 것임에 틀림없구먼.'이라고까지 하셨다고 한다. 비록 문재인 대통령처럼 부산으로 올라오지 못하고, 다니던 중학교가 폐교되는 바람에 가방끈이 짧으실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 아버지의 에피소드를 듣자면, 지금 나는 왜 이 모양일까 하고 한 번씩 되돌아본다. 아버지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기에 그를 닮기보단 멀어지고 싶은 적이 더 많았다. 하지만 그 좋은 두뇌와 체력(아버지는 시골 사람 아니신가?)을 물려받았으면 지금 나의 상태도 썩 뭐... 하버드대인가, 예일대인가, 케임브리지대인가, 옥스퍼드대인가, 서울대조차도 아니지만, 나의 아버지는 한국의 사회적 제약(학벌) 때문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환경이었다고 치부하더라도 나, 나 자신은 그렇지 않다. 지금 이처럼 무엇 하나를 제대로 파고 들어서 성공하기 좋은 때와 결혼하지 않아도 별 눈치 안 봐도 되는 시대에서 무엇이 부족해서 자신의 꿈 하나 못 이룬다 말인가?


그래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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