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속성과 그 나라의 국민성은 다르다.
버스를 탔다. 버스 좌석에 앉아 위를 바라보니 공기정화장치 옆에 한 문구가 보였다. 문구에는 '공기정화장치 방역필터 가동 중'이라는 한글이 보였고, 위에 영어로 'PURIFIED'라고 덧붙여 있다. 이것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영어의 함축성, 추상적이지만 간결함? 한글의 비함축성, 많은 글자 수로 인한 난해함... 이것으로 인해 드러나는 영어권 국가는 간결하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데의 부러움... 등 여러 생각이 한 번에 떠올랐다.
바바라 민토라는 컨설팅 회사(맥킨지)에서 창안한 '로지컬 씽킹'에서 가장 중요한 글쓰기 요소를 언급할 때,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해야 한다'라고 한다. '논리적 생각'이라는 글쓰기 방법론을 만든 한 서양의 권위자의 말을 인용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위의 문구와 같이 한글은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메시지에 군더더기가 많이 붙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서양권의 글쓰기 이론에 대조시켜 부각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지금 이 글을 긁적이고 있는 까닭은 'PURIFIED(정화되는)'라고 단 8글자의 알파벳으로 표기한 문구가 영어뿐만 아니라, 서구권의 문화를 대변한다고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 혹은 근성은 그 나라 사람이 쓰는 언어의 습관이나 행태와는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국은 중국의 표의 문자(즉 뜻을 나타내기 위한 문자)인 한자를 받아들인 아시아 변방의 나라다. 영어는 유럽에서 라틴어부터 시작해서 게르만어(독일어), 프랑스어, 온갖 유럽언어의 영향을 받아서 거의 잡식성의 언어다. 많은 풍파를 거쳐서 지금의 영어가 쓰이게 되었지만 확실한 하나는 표의문자라기보다는 표음 문자(즉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문자)에 가깝다.
그에 반해 한국은 한글 자체는 표음문자이나, 한자를 함께 쓰기 때문에 표의문자도 함께 사용하는 나라 중 하나다. 그래서 그런지 한자어로 표현하면 간결하게 나타낼 수 있는 문자를 한글로 표현하면 문자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어는 표음문자에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간결하게 내용을 표현할 수 있을까? 다른 예를 들면, 미국에서 9/11 사건이 터진 후, 동부 지역인 버클리의 학교나 대학생들의 모든 텍스트 표지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붙어있었다고 한다.
'No Blood For Oil'
당시 미국에서 9/11 테러가 발생한 후, 'No Blood For Oil' 슬로건은 미국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중동에서의 석유 자원 확보와 관련하여 전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 한다. 9/11 이후에도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성향을 갖고 있던 버클리 대학생들은 전쟁에 반대하는 뚜렷한 반전쟁 감성을 보였다.
그러면 한국에서 저 문구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라크에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하는 슬로건을 만든다면 말이다.
석유를 위한 전쟁은 없다
우리는 문장으로 표현해야 전달이 가능할 것 같다. 영어는 함축적으로 표현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은 사자성어나 한자를 차용하지 않고는 간결한 표현이 힘들다. 사실 영어 슬로건인 No Blood For Oil도 어떤 문장을 줄인 형태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한국인의 정서가 빨리빨리 문화에 단련되어 있는 것과 우리 고유 언어의 성질과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 나라가 사용하는 언어와 국민성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과관계과 아니라 그저 상관관계로 필자가 논리적 오류를 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루 먹는 밥 세끼가 나라는 사람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행위를 표출하는데 연관성이 크다는, 즉 식단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쉽게 보고 남발하는 말에서 그 사람의 속성을 나타낼 수 있는 기본 요소가 될 수도 있다. 요점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해진 현대사회에서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한국의 언어 컴플렉스가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