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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gi Seo May 01. 2016

영어공화국 대한민국

껍데기만 까고 보는 대한민국 영어교육 올 단두대!

이 글은 여타 영어 방법론과 같이 언어 및 인지학적 이론(Stock)의 근거를 기반으로 참인지 거짓인지 판가름할 수 있는 혹은 본인의 영어시험 고득점 성공사례를 들어 사실 여부를 입증할 수 있는 가설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Flow)로 간주해서 영어학습의 합리성만을 독자의 판단에 맡김을 먼저 알립니다.







위의 그림에서 각 언어에 해당하는 원을 제외한 부분, 바탕색은 인간이 언어를 받아들이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복합요인을 나타낸다. 영어를 학습하는데 모국어(Mother Tongue: 태어나서 처음 접하게 되는 언어) 기반 학습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한 번씩 영어뉴스를 듣기 전에 한국의 관련 소식을 먼저 접하고 들으면 무작정 영어를 들을 때보다 내용이 와 닿는다. 한국어와 영어 어순이 대체로 반대라서 의미 해석의 간섭효과가 일어날 거라는 섣부른 걱정은 오산이다. 오히려 내용의 이해가 문법과 해석보다 앞서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는데 중요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다른 나라 말을 받아들이는데 일단 마음이 그 언어를 배우고 활용하겠다는 동기부여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 그래서 모든 언어를 받아들이는데 손이 먼저 올라가고 표정과 몸이 앞서 반응하는데, 아래 그림처럼 각 언어의 서로 겹치는 부분만을 제외한 영역을 순수한 언어감각과 상황의 이해도 그리고 불확실한 것에 대한 포용력이라고 표현하겠다.



미국인이 한국어를 30년 간 사용하고 독학하면서 터득한 동서양 사고방식을 비교할 수 있는 영어회화 길잡이를 쓴 책이 있다. 과연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은 한국생활에서 부딪힌 이해하지 못할 상황과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원어민의 관점으로, 동양인이 납득하기 쉽게 쓰여있다. 로저 펄버스의 '영어회화 절대로 외우지 마라'라는 책으로, 제목이 '영절외'로 영절하처럼 축약되지만 외우지 않고도 영어회화가 술술 된다는 사이비 교리의 전도서가 아니다.



이 책을 통해 동서양 사고방식의 차이를 이해하고 동시에 상황에 따른 그들이 내뱉을 수 있는 표현을 접한 뒤 패턴 영어 학습으로 넘어가면 한국인이 회화 도중에 번역식 영어의 폐단으로 생성되는 콩글리쉬(Broken English: 미국인이 듣기엔 어색한 영어 쓰임새)를 쉽게 극복하리라 본다. 한국인이 쓴, 특히 연예인들 영어 성공기에서 발췌한 회화패턴, 그리고 각종 포털사이트를 검색해서 무작정 추출한 번역은 네이티브들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영어를 가볍게 접근한다며 쉽게 가이딩 당할 수 있는 저작물과 매체가 넘쳐나는 환경이 오히려 영어 초심자(English Beginner: 학교 영어교육과 별개로 순수한 영어를 배우는 단계의 입문자)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다.



패턴 영어의 참고서적으로는 이찬승의 '한국인이 꼭 알아야 할 필수 회화 구문 140'이 마음에 든다. 말문을 열 때 무의식적으로 습관화된 생각의 발로가 영어로는 이러한 패턴들로 시작한다. 한국인이 대체로 실수하고 어려워하는 패턴들을 분류해서 한국인의 언어습관을 영어식 표현으로 가이드해주는 책이다. 패턴회화는 어느 정도 영어를 말하는 데 자신감이 붙은 후 무작정 암기하기보다는, 자신이 말할 때 많이 취하게 되는 습관적 언어 패턴을 영어로는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표현'하는구나를 알고 발화 방식을 교정하는 계기로 삼는 게 어떨까?



그리고 한글로 풀이된 배경 설명과 어휘가 자신이 영어식 사고 전반에 도움을 줄 마지막 가이드로 '세계 역사 이야기' 원서를 이용한다. 특히 CD에 녹음된 성우의 목소리가 감정이입까지 되어있어서 쓰인 문장의 의도까지 느껴질 수 있다. 수잔 와이즈 바우너의 'World of Story' 고대 I~현대 II 8권 한 세트로 미국 초등학생 읽기 수준의 이야기책이다. 나는 이 중 중세 편을 통해 본인의 영어 목소리를 만들었다. 고저장단 음색의 목소리가 아니라, 영어식 사고로의 나의 어감을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와 합일시켜 내 생각의 목소리를 정립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그 저자가 미국인이라서 서양중심주의(Orientalism: 서양에 의해 구성되고 날조된 서양 제국주의의 정당성을 합리화한 역사관)로 세계사를 해석했더라도, 일단 모방이 최고의 학습도구이기에 저자의 생각에 대한 맥락과 하나의 세계관을 그대로 내 생각의 프레임(Frame: 생각의 틀)으로 쌓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로 인해 내가 말할 수 있는 하나의 영어식 사고법을 정착시켰다. 이 말은 이제 다른 이가 말하는 영어를 나의 영어식 사고와 비교할 수 있는 근간이 마련되었다는 거다. 자신의 영어식 사고에 대한 무의식적인 뉘앙스가 없다면 어떻게 타인이 영어를 말하는 것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타당성을 판단하겠는가? 비교할만한 껀덕지기가 없는데. 오로지 한국에서 길들여진 동양인들의 변증법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영어를 받아들이는데 자꾸 번역하고 그들의 일방적인 논리를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었다면 스스로 습관화해서 쌓은 영어권 국가의 이분법적 논리와 삼단 논법으로 그것을 견줄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으니 들려지는 영어를 재해석할 여지가 줄어들었다.



모국어 기반의 한국어 사고방식 모드
모국어 기반 학습이 결여된 영어식 사고 모드


그리고 영어와 한국어의 두 원을 이제 'AND'모드로 겹쳐서 번역할 필요 없이 영어를 쓸 때는 영어식 사고로, 한국어를 쓸 때는 평소대로 한국어 사고방식으로만 전환할 수 있는 'OR'모드 형태의 언어의식 구조를 위의 두 그림으로 나타냈다.



모든 언어의 기반 학습은 모국어가 밑바탕이 된다. 우리가 영어권 국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영어를 듣고 말할 때 전달하는 의미를 모국어인 한국어로 힌트 삼아 ‘감정 이입’하는 노력을 해야 하며, 그것을 간격을 두고 인출하는 노력까지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고 껍데기인 그 나라의 문자와 내뱉는 말에 집중을 하면 그 언어가 쓰일 때의 맥락(Context)과 의도(Voice)를 절차적 기억(Procedual Memories: 지식의 빠른 학습으로 단기적으로 기억되는 서술적 기억과 달리 자전거를 탈 때처럼 암묵적으로 몸에 체화되는 습관의 궤적에 따라 자연스럽게 떠올려지는 기억)으로 남기기가 어렵게 된다. 자전거를 탈 때 오르막길에 들어서서는 힘드니까 기어를 올려야 하고 커브길에서는 위험이 느껴지니까 속도를 줄여야 한다는 것은 부딪히는 상황이 자신의 행위(곧, 발성)를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그래서 한국인의 발성처럼 일정 호흡 단위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말하려는 바의 의도(강세, Accent or Stress)와 느껴지는 이미지(어휘의 뉘앙스, Nuance and Scheme)에 따라 발성하는 영어 원어민의 강세 단위는 절차적 기억에 저장되어 있는 언어를 더 쉽게 끌어낼 수 있다. 실제로 원어민의 발음은 한국인의 단어나 구문 단위로 발음하는 영어와 달리, 강세 단위별로 억양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발음의 굴곡이 더 심하다. 그러니깐 느낌과 의미를 반복해서 자신의 몸에 체화하는 연습이 곧 강세가 의미 전달을 보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영어 학습의 본질이 된다. 왜냐하면 영어는 한국어와 달리 말의 순서를 알 수 있는 토씨어(조사)가 없어 어순만이 말을 나열하는 주요한 규칙이 되기 때문에 말하는 데 있어서 소리의 역할이 더욱 크게 차지하기 때문이다.



십이 년째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기록하는 한국 사회에서 생활하는데 대부분은 '헬조선'의 분위기가 엄습하는 사회심리적 해이로 인해 모국어 기반의 학습조차 부정적인 색깔로 칠해지겠지만, 각 언어의 문화권에 대한 '프라이머(Primer: 어떠한 행위를 하기 전 그 행위와 연관된 분위기를 통해 관련 사고방식의 점화 역할을 하는 촉매제)' 기능을 하는 습관적 상식과 관점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어떠한 나라의 언어도 사실 상 껍데기만 까고 또 까는 모국어 응용학습만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관점의 기반이 모국어일 뿐이지 그 관점을 쉽게 벗어날 수 있고 전환할 수 있는 유연성이 언어감각이다.



영어가 일인칭 관점의 언어이고 한국어가 삼인칭 관점의 언어라서 서양문화와 관습이 동양의 것보다 본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에 도움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영어로 의견을 말할 때는 내가 관찰한 사물에 대한 생각이 곧 타인의 생각도 그러하리라고 믿는 게 전제된다. 이것이 그리스 시대부터 본인 생각의 검증을 위한 토론문화가 발달한 이유이고 글쓰기만큼 말을 잘하는 능력을 영미권 국가에서는 우위로 치켜세워준다. 반면에 아시아권은 말보다는 행동, 동사적 발현을 우선시한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자각 있는 행동이 낫다는 격언은 동양인의 관습과 문화를 드러내 준다.



어떠한 사고방식과 관습 그리고 환경이 우위에 있다는 것은 그 사고방식의 주인인 국가의 부권에 따라 결정된다. 영어 공용어 운 때운지도 벌써 사분의 일세기가 지나간다. 영어를 정복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미국을 정복의 대상으로 볼 수 없듯이), 영어를 쓰는 국가권의 역사와 문화를 살피고 그들과 타협할 수 있는 선에서 자국권 문화와 사회정책을 온고지신해야 한다. 모국어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도 없는 마당에 타국의 언어를 숭배하듯이 배우는 요즘, 글보다 말이 먼저고 말보다는 해당 언어 소리에 귀가 트여야 한다는 게 언어교육의 추세다. 그렇다고 혀까지 교정하고 귀가 진짜 뚫릴 때까지 영어만 듣고 자기 전에 큰소리로 영어만 떠들어야겠는가.



외국말을 가장 창의적으로 발화하는 방법은 모국어 기초공사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그 나라말을 쓰는 원어민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나의 생각으로 모방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원어로 된 책의 독서와 스트레스 단위별 끊어 읽는 연습은 만국의 외국어를 비약적으로 향상하는데 최고의 수단이다. 한 저자의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의 생각을 게네들의 사고방식 흐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다. 사실 한국인 개개인의 언어 수준의 날도 독서를 통해 앞선 수준의 타인의 생각을 모방해서 얻어진 부산물이다.



한국의 시험을 위한 영어공부는 일제시대 식민지 지배 하에 행해진 획일적이고 전체주의적 교육의 잔재에 불과하다. 그러한 교육법으로 나라를 반쪽으로 만든 이승만이 영어를 잘했었는지, 쿠데타 후 미국으로 도주한 서재필이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었는지, 윤봉길이 영어는 못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 보통 대다수의 사람들은 흔한 영어 구사는 실패하지만 잘난 엄친아 키우는데 이산가족의 파탄을 감내하면서도 천문학적 투자를 대물림하고 하고 있다. 좀, 잘못된 게 보이고 예산이 국어교육보다 몇십억 더 쏟아부어도 제자리걸음이면 그만 좀 낭비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권위주의 문화로만 꽉메단 머리만 달고 경제적 예산 분배는커녕, "대한민국 치킨 공화국"은 왜 운운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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