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ntum Leaf of Thought
대중에게 잘 알려진 유시민 작가가 근래에 방송에서 말한 내용의 진위를 한 PD 작가가 확인하였는데 탈원전부터 몇몇 근거의 사실이 잘못되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심층적 내용은 다소 오해될 소지가 많다는 부분이었다. 기사의 진위를 떠나서 유명인사의 관점과 사고(思考)가 적힌 책들은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읽히고 있다.
물리학자들이 지금까지 반증하지 않고 잘 따르고 있는 뉴턴의 에너지 제 일 법칙이 우리 생활의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 아마도 위의 현상은 보이지 않는 관성에 따르는 대중들의 심리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스무 살을 갓 넘어 도서관에서 접한 많은 책들 중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14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다시 읽히고 있지만 유시민 작가의 진담 같은 사건의 진상보다는 확실한 보증수표를 건네주고 있는 거 같아 속이 시원하다.
필답시험을 구시대의 답습이라고 생각하며 시험 없는 시대의 현대인의 생활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이 많다. 그러나 시험만큼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 본인의 위치를 간단하게 나타내 줄 수 있는 강력한 도구는 아직까지 발굴하지 못했다. 그러니 현재도 미래도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혹은 생계를 위해서라도 현대인들은 시험이라는 굴레에서 못 벗어날 듯하다.
한편 시험에서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는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출제자의 관점에서 시험 문제를 예측하는 것이고, 둘은 나 자신이 출제자가 되는 것, 즉 '게임 체인저'가 되어 룰을 나의 관점대로 세우는 것이다. 두 번째 전략은 시험 응시자를 위한 범위에서 벗어난 가설이고 첫 번째 전략을 다시 말하면, 출제자의 사고에 최대한 들이대는 것이다. 아는 사이라면 출제 문제를 구걸해서 얻어내는 것이 시험의 당락을 한 번에 결정짓는 최고의 묘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불가능한 접근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출제자의 의도를 예상할 수 있는가?
그가 혹은 그가 바통 체인지 하기 전의 출제자들의 지금까지 냈던 문제들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들의 출제경향을 패턴화 시켜서 다음 회차 출제를 합격 범위 내에서 예상할 수 있다면 시험의 당락을 긍정적으로 결정지을 수 있다. 출제자라는 변수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므로 그 경향 역시 시시때때로 바뀔 수 있다. 시험을 치르는 시대의 성격을 반영할 수 도 있는 시험 같은 경우는 출제 경향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더욱 어렵다. 마치 바보 소리 듣기를 각오하고 '이것이 묘수'라고 지르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냉정하리만큼 완벽한 한 수 한 수를 두었던 알파고가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다음 수를 두었을 때 세간의 이슈가 되었던 장면을 각오해야 하듯이 말이다.
다시 집어 든 J. S. 밀의 자유론은 나에게 쉽게 읽혔다. 나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내용이 이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번역자는 나와는 반대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역자가 고등학교 시절에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읽기 쉬운 책인 거 같다고 하였는데, 이후 번역할 시기에 다시 이 책을 볼 때는 굉장히 난해한 문체라고 말하고 있다. 역자가 조언을 구한 미국 원어민들조차 이 책은 같은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에게도 어렵기로 정평이 난 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하튼 역자가 번역에 공을 많이 들였다는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여담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은 저자의 생각을 한 묶음으로 받아 적은 하나의 생각 덩어리이다. 시험으로 치면 출제자가 출제 시 소스로 참고해야 하는 서적의 사고 덩어리이며, 시험은 이 사고 덩어리를 여기저기서 발췌해서 출제자의 관점에서 이건 이렇다고 생각하는데 너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묻는 형식의 시스템이다. 사실 나는 반박하고 싶고, 어디서 이딴 사고뭉치를 끄집어 왔냐며 딴지를 걸고 싶은 경우가 더 많았지만, 누군가 표제어처럼 사용하는 '현대인'은 출제자의 사고방식에 구속되어야만 남들한테 득의양양할 수 있는 점수를 매길 수 있다. 이 점수라는 낙인이 누군가 표제어처럼 사용하는 '현대 사회'에서 줄 세우기의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싫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여기까지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는 밀의 '자유론'에 관한 내용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있거나 제목이 먹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뭐 이딴 꿍꿍이 같은 얘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며 애당초 한 서너 문단 앞에서 글 읽기를 멈추거나, 아니면 드래그 앤 클릭으로 이미 자신의 읽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득의양양하게 표현하고 나갈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기대를 하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알파고와 같은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J.S. 밀의 '자유론'이 나에게 쉽게 읽혔다는 것은 그의 글이 쉽다는 의미가 아니다. 밀이 이 책을 쓸 당시의 배경과 그가 처한 상황 그리고 그의 파트너('정확하게는 불륜으로 맺은 부녀자')의 이해관계에 관한 내용인 서문을 두세 번 정독하고 나서 그의 글을 보니 그의 관점에 따라 글을 수용할 수 있는 사고의 범위가 확장되었다는 의미다. 그와 같은 상황과 배경에서 내가 인간의 자유, '공리'에 대해서 쓴다면 나도 밀처럼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겠구나는 공감능력이 다만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인물에 한정되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그는 1850년 대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경제학자로서 철학자로서 앞선 시대의 사상을 갈무리한 대표적인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는 학자인데, 내가 그처럼 글을 쓸 수 있겠다는 말이 아니다. 천재라는 수식어는 그에게 붙이기에 왠지 사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요즘 일컫는 '홈 스쿨링'으로 키워진 유기농 인재였다. 대개 정규교육과는 거리가 먼 서양의 위인들이 어릴 때, 열등아라고 주위에서 손가락질받으며 자란 것과 대조적으로 밀은 아버지(제임스 밀)의 영향으로 너무 이른 시기에 조숙해져서 청년 시절에는 6개월 간 남몰래 우울증을 겪기도 하였다. 왜냐하면 감성과 감정을 배제한 채 객관성만을 기준으로 한 자신의 사상 정립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남몰래 겪은 우울증을 단 한 번도 내색하지 않다가 당대 누군가의 낭만시를 읽고는 눈물을 쏟으며 아버지에게서 영향받은 사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 교육에서 가장 큰 병폐는 대입 시험이다. 그런데 이 병폐를 받아들이고 넘어서면 자신이 갈구하는 삶을 찾아서 행복해질 수 있느냐, 대부분이 '아니요'라고 답하리라 본다. 사실 시험라는 것은 자신의 적성과 무관한 능력에 대한 주입식 교육 평가의 객관성만을 가리기 위해서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시험을 보는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장애물인데, 이것을 수용하는 구조로 만든 사회의 시스템이 현재 대한민국—물론 대한민국만 그렇겠는가—의 경제와 정치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기능하게끔 강제하고 있다. 누가? 교육학자, 정치인, 대통령 전부 이러한 시스템의 시행착오로 길러진 세대들이고* 시험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거두절미하고 들어가는 필터링에 의해 누가 누군지, 누구의 책임인지 손가락을 자신에게 가리킬 수는 있겠는가.
나에게 한 가지 고무적인 건,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사람에게 감정 이입하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이 누구에게든지 난관으로 보이는 시험이라는 존치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생각을 가져다줬다는 것이다. 한 번쯤 언론에서 회자되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라는 논술의 수준이 아니고서야 시험의 수준이 응시자의 사고력까지 측정하는 테스트는 드물다. 즉, 얼마만큼 사고를 확장할 수 있고 그것을 신빙성 있게 전달할 수 있느냐의 능력은 대한민국 교육에 지각변동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정착되기까지는 먼 훗 날의 얘기이다. 현재도 시행되고 있는 대학 논술고사에서 출제되는 문제와 바칼로레아에서 묻는 기출 질문의 수준을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란다. 그러면 프로그래밍에서 결괏값을 이리저리 던져놓으면서 갑자기 컴퓨터 혼자서 저잣거리로 놀게 만드는 무한루프 현상이 자신의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직감할 것이다.
책은 저자의 사상을 온전히 담기에는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지은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가 그대로 전달받기에는 무리다. 저자의 논점을 명확히 꿰뚫는다는 것은 저자가 어떠한 사건이나 원천으로 인해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저자에게 그 책을 쓸 당시에 어떠한 걱정거리가 있었으며, 과연 어떠한 욕구가 있었고 그 욕구를 짓누를 수 없었기에 글로써 자신의 욕망을 표출하는지는 그 저자가 돼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부모 중 어느 누가 아무리 힘든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자식은 부모의 입장이 되어서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상 그 심정을 깨달을 수 없다. 하물면 이 딱딱한 책 한 권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할 수 있으리라.
반면에, 책을 쓴 사람의 글을 통해 최대한 많은 감정이입과 몰입의 경험을 한다면 다른 사람의 관점을 통해 똑같은 사물이라도 다르게 볼 수 있는 사고력을 함양할 가능성은 있다. 응시자가 공부해야 하는 시험의 내용은 문제와 답을 맞히기 위해서는 중요하다. 문제에 들어맞는 답만을 맞히기 위한 시험은 초반부에 말했듯이 출제위원의 출제 패턴을 분석하는 기술만을 공략하면 목표로 하는 합격선은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출제위원과 같은 생각의 수준에서 문제의 경향을 예측 및 판단할 수 있는 사고력 측정을 위해서라면 다른 시대의, 다른 배경의, 다른 인물의 관점에서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같은 대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라는 사고력 훈련**을 많이 한 사람이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밀의 '자유론'은 나에게 시험에서 있어서만큼은 자유를 안겨다 주었다.***
* 이 글을 쓰는 작자는 이해찬 1세대로 그 정책 사안을 그대로 실천했었던 그 당시 학교의 이단아였다.
** 이것이 '독서'다.
*** 엄밀히 말하면 그의 자유론은 나에게 궁극적인 자유가 아니었다. 자신의 욕망을 사회에서 재단하는 평가에 비추어 똑같이 바라보지 않는 자유야말로 작자에게는 진정한 자유라는 결론을 내던지게 했다.
참조 서적:
1) John Stuart Mill. 권기돈 옮김. 자유론 On Liberty. Penguin Books Ltd, 2015.
2) 최병권.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휴머니스트, 2003
세계의 교양을 읽는다 바칼로레아 논술고사의 예리한 질문과 놀라운 답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