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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학 Sep 11. 2017

프로세스를 맹신할 때 생기는 일

수단과 목적의 본말전도

나는 작은 컨설팅 회사에서 커리어를 처음 시작했다. 이 곳은 시스템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는 회사였다. 경비 정산, 휴가 신청 등의 프로세스가 있기는 했는데 엑셀 양식 정도만 몇 개 있을 뿐 모든 소통은 이메일로 이루어졌다. 이후에 좀 더 큰 기업에도 다녔었는데 그곳도 시스템이 약한 편이었다. 그러다 지금은 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작은 회사와 큰 회사를 모두 다녀본 사람은 아마 느꼈을 것이다. 큰 회사는 시스템과 프로세스가 잘 갖춰져 있어 일하기 편한 대신 절차가 많고 결재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작은 회사는 상대적으로 의사결정의 시간이 빠르고 챙겨야 할 문서/절차가 단순한 반면 일의 진행이 개개인의 능력과 인맥에 좌지우지되는 단점이 있다.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브리지워터 어소시에이츠의 창업자 레이 달리오는 조직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설계된 기계에 비유한다. 기계의 각 부분은 맡은 역할이 있으며, 프로세스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야 조직 전체가 원하는 성과를 낼 수 있다. 무인양품의 창업자 마쓰이 타다미쓰도 '무인양품은 90%가 구조다'라는 책을 썼으며 매뉴얼화할 수 없는 것까지 매뉴얼화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프로세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프로세스는 기업 운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특히 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프로세스와 시스템을 고려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프로세스 그 자체는 목적이 아니다


우선 프로세스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프로세스에 둘러 쌓이다 보면 절차와 시스템 그 자체에 집착하게 되고 목적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애초에 프로세스를 설계한 사람이 왜 그런 프로세스를 만들었는지 목표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매뉴얼 교육에만 열을 올리는 경우도 많다. 


지금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이야기이다. 아침에 갑자기 상사분께 사내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잠시 시간이 되냐고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메신저로 질문이 온다. 회사 생활은 어떤지, 하고 있는 업무는 만족하는지 등등. 처음엔 새로 입사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구나 싶었는데, 질문을 연속으로 몇 개 받고 나서 이분이 인사팀이 준 질문 리스트를 메신저 창에 복사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새로 뽑은 경력직이 적응을 잘 못하거나 금방 회사를 떠나버리면 안 되니까 케어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입사 후 몇 주 안에 상사가 면담을 해주도록 프로세스를 만들었을 것이고, 그냥 하라고 하면 대충 때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면담 시 확인해야 할 질문 리스트도 마련했을 것이다. 면담 후에 제출해야 할 양식을 만들고, 만나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라고 예산도 배정해주면 인사팀 입장에서는 '이 정도면 ok' 싶을 것이다. 여기서 이 모든 것의 목적은 ‘경력직의 빠른 회사 적응'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 면담은 처음의 목표인 ‘경력직의 빠른 회사 적응'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물론 나는 여기는 이런 분위기구나 깨닫고 안 좋은 의미로 회사에 금방 적응하기는 했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매뉴얼에 '메신저로 면담하면 안 된다'를 추가한다고 해결될까? 아무리 자세히 써도 예외 상황은 항상 발생한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끝없이 나열해 봐야 매뉴얼만 길어지고 오히려 아예 안 읽는 사람만 늘어나게 된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프로세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프로세스와 매뉴얼만 강조하지 말고 왜 이것이 필요한지 목적이 먼저 분명하게 공유되어야 한다. 또한 무엇을 측정하는가 와도 관계가 있다. 회사에 적응했는지를 직접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면담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측정된다. 그러다 보니 측정당하는 입장에서는 측정되지 않는 목적보다 측정되는 수단이 더 중요해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프로세스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사람은 지표를 모니터링할 뿐만 아니라 측정하는 지표가 적절한지, 목적이 달성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프로세스를 업그레이드해나가야 한다.



프로세스가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면 안 된다


프로세스는 목적의 자리만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기본적인 가치 판단의 자리까지 위협하기도 한다.

올해 초 기사에 모 세무서 직원들이 주말 출퇴근 기록을 허위로 남겨서 수당을 받았다가 기소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사실 올해 초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이런 사례는 주기적으로 계속 등장한다. 이런 일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것이 '시스템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근태 시스템에 접속하거나 카드 리더기에 사원증을 찍는 것은 보통 사무실에서만 가능하게 되어있다. 그 말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기록만 남길 수 있으면 적어도 시스템 상에서는 일한 것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기사에 나오는 사례들처럼 자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동료에게 알려주든지, 퇴근하고 집에서 쉬다가 느지막이 다시 사무실에 나와 카드만 찍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생긴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상식적으로 해도 되는 것'에서 '시스템에서 가능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설계하는 사람은 '해도 되는 것'을 감안해서 '시스템에서 할 수 있는 것'을 구성한다. 그런데 사용자가 

시스템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전부 '해도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골치가 아파진다.


세무서 직원에 대한 기사는 다음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경찰은 현재 국세청 전산망은 아이디나 비밀번호만 알면 누구나 허위로 시간 외 근무를 입력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돼 국세청에 제도 개선을 통보했다고 덧붙였다.’ 

물론 시스템이나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부정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허점을 남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지만 애초에 왜 '허위로 근무시간을 입력할 수 있더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라는 것을 다 큰 성인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것일까. 


극단적인 예를 들기는 했지만 실제 일하다 보면 이런 사례들을 꽤나 자주 접하게 된다. '해도 되는가'의 기준을 '시스템에 그런 프로세스가 있는가', 혹은 '이렇게 비용을 올려도 위에서 결재해줄까' 같은 식으로 판단하는 경우 말이다. 개개인마다 임의로 판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프로세스의 기능 중 하나라지만, 프로세스가 판단을 아예 대체해버려서는 안 된다. 특히 프로세스 상의 허점을 꼬투리 삼아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사람들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프로세스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이 제대로 달성되는지 피드백하면서 프로세스와 측정 지표들을 계속 개선해 나가야 한다. 시스템상 가능하다고 모두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으로 하면 안 되는 일만 참아도 많은 부조리를 고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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