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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물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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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쑤 Jun 14. 2016

율마: 딱 맞지는 않는 옷

내가 처음 산 식물은 율마였다. 남편이 율마를 좋아했다. 그리고 식물의 종류가 많아진 지금, 나의 반려식물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도 율마를 선택할 것 같다.


율마에게는 마당이나 정원 같은 야외 노지가 정답이다. 하루종일 햇볕을 쬐면서 숭숭 부는 바람을 즐겨야 맞는 식물이다. 그러니 이런 율마에게 아파트 베란다는 딱 맞지는 않는 옷일 것이다. 그래도 우리집 율마는 베란다에서 잘 산다. 햇빛도 조금 부족하고 바람도 조금 부족하고, 지상으로부터 11층 높이만큼이나 떨어져있지만, 투정부리거나 우울해하지 않고 딴 생각 안하고 잘 산다.


우리집 율마는 시들거림 한 번 없이 사시사철 싱그럽고 탱탱한 연두를 띤다. 쓰다듬을 때마다 피톤치드 향기도 흠뻑 안겨준다. 향이 짙어 벌레도 안 꼬이고 그 외 이상한 벌레가 생겨난 적도 없다. 그런 와중에 폭풍성장도 한다. 재작년 봄에 양재시장에서 데려온 율마아이는 일년에 족히 삼십센티 정도씩은 훌쩍 커버리는 것 같다. 데려올 당시 키가 50센티였는데 지금은 무려 126센티에 달한다. 두어달에 한번씩 키를 재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기특하게도 잘 살아주는 율마가 너무 좋아서, 그리고 오히려 아파트 베란다에 가장 잘 맞는 식물은 율마가 아니겠냐는 생각마저 들어서 지금 나의 베란다에는 율마가 8그루나 있다.


좁은 베란다에 율마를 데리고 살면서, 잘 살아줘서 기특하다고 하는 율마의 주인인 나는 그럼 어떠한가. 나는 지금 딱 맞는 옷을 입고 살고 있는가. 옷이 안 맞는다고 신세타령만 하고 있지는 않은가.


바이올리니스트 이작 펄만이 1995년 뉴욕 링컨 센터에서 연주할 때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펄만의 바이올린 줄 하나가 ‘태앵’하면서 끊어져 버린 것이다. 연주 중에 현악기의 줄이 끊어지는 것은 아주 없는 일은 아니지만 무척 난감한 돌발상황임은 분명하다. 연주는 줄의 끊어짐과 동시에 급작스레 중단되었고, 새로운 줄을 갈아 끼우거나 다른 사람의 바이올린을 빌려와야 했다.  그러나 펄만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계속 할 수 있다라는 시선을 보냈고, 펄만은 한 개의 줄이 없는 ‘3현’ 바이올린으로 연주를 해냈다.


나도 취미로 비올라를 하긴 하지만 줄 하나가 없는 채로 어떻게 교향곡을 연주할 수 있을까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노래방에 가서 여자가 남자가수곡을 부를 때 혹은 남자가 여자가수곡을 부를 때 사용하도록 ‘여자키’ 혹은 ‘남자키’ 버튼이 노래방기기에 있곤 하는데, 펄만도 이런 식으로 연주곡의 음역을 바꿨을까 하는 생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순간적으로 그 복잡한 악보를 그 수많은 청중 앞에서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었을까. 당시의 공연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마 전율을 느꼈을 것이고 손바닥 핏줄이 터지도록 박수를 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다.


나아가 공연이 끝난 후 펄만이 했다는 말은 더 큰 울림을 갖는다.


“ 조건은 전부가 아닙니다. 사는 것은 뜻하지 않은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저는 모자란 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 때로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가들이 하는 일이니까요. 비록 줄 하나가 끊어졌지만, 세 개나 남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저는 소아마비를  앓아서 다리를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발을 짚고라도 걸을 수 있어 감사합니다   바이올린 줄이 하나 끊어졌으나 세 개나 남아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남은 것으로도 무엇인가를 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딱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살면서도, 최적의 조건이 아닌 환경에 살면서도 이렇게 사시사철 연두빛 잎을 빽빽하게 유지하며 키도 쑥쑥 자라는 율마는 얼마나 의연한 식물인지. 이작 펄만과 우리집 율마는 완벽한 공감을 이룰 것 같다. 나와 남편이 만약 도시의 직장을 떠나 지방 모처에 터를 잡고 집을 짓고 마당정원이나 온실을 갖게 된다면 율마는 물 만난 고기처럼 더욱 진한 연둣빛과 더욱 짙은 향기를 뿜어내면서 더 쑥쑥 자라날 테지만, 지금의 율마도 어디 크게 모자라거나 힘들어하는 모습 없이 아름답게 자라주고 있다.


햇살과 바람이 풍성한 마당정원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서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율마에게 해주고 있다. 베란다에서 가장 좋은 명당 자리에 율마를 놓아두고는 햇빛을 고루 받도록 며칠에 한번씩 화분도 돌려주고 바람이 계속 들어오도록 미세먼지가 많은 날일지라도 창문을 열어둔다. 물을 줄 때도 화분 흙의 표면을 보고 흙속에 손가락을 넣어서 수분기를 살피면서 하고 있다. 또 처음 율마를 들이면서 토분이라는 것을 처음 샀는데, 색감도 마음에 들었지만 통기성이 있어 화분이 숨을 쉰다는 말에 율마에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율마 뿐 아니라 다른 식물들에게도 모두 토분을 집으로 마련해주고 있다.

나는 외국계 회사의 법무팀에서 일하지만 변호사는 아닌 사람이다. 그래서 니가 하는 일이 뭐냐고 언젠가 묻던 엄마에게는 변호사 사무실에 있는 사무장하고 비슷하다고 얘기하기도 했고, 엄마에게 하는 얘기이므로 한껏 과장을 하여 ‘인정 받는’과 ‘바깥 변호사들을 관리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으며, 병원에 가면 웬만한 젊은 의사들보다 나은 수간호사가 있지 않느냐면서 나도 그런 사람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한켠으로는 그래도 일종의 자격지심이 내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변호사가 아니라서 이렇고 변호사가 아니라서 저렇고, 내가 변호사가 못 된 것은 돈이 없었고 시간이 없었고 이제는 나이가 들었고 등등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얼마전엔가 본 뉴스기사에서 “she for she”라는 여성 변호사들의 모임에 대한 내용을 보고는 조금 씁쓸해지기도 했었다. 한국마이크로소프트의 주최로 여성 변호사들 100여명이 모여 선후배 및 동료 변호사들간에 공감도 하고 조언도 하는 좋은 자리였던 것 같고 사진과 기사에 보이는 그들이 참 멋져보였다. 그런데 나는 참 못났게도, 그 모임에 참석한 여성들이 나보다 어리거나 나와 비슷한 연배이고, 그들은 유명한 로펌과 기업에서 변호사로서 이렇게나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무엇인가하는 자조가 들었다. 쿨한 척은 다하면서 진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것이, 나는 이미 한국이라는 나라가 만들어 놓은 성공에 대한 정답지에 이미 세뇌된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변호사가 아니라서 오히려 변호사들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을 잘 처리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변호사가 아니라서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더 인정을 받고, 변호사가 아니라서 부담감이 좀 덜하고, 회사 입장에서도 나와 같은 비변호사 법무경력자를 필요로 하는 부분이 확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러한 나를 신뢰하고 아껴주는 상사가 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고 얼마나 좋은가.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로 유명한 이희아가 어느 인터뷰에서, "없는것에 불평하지 말고 가진 것에 감사하라"고 하면서"노력하지 않는 태도를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한 것이 생각난다. 새삼 그녀의 말에서 힘이 느껴진다.


플라톤이 말했다는 행복의 조건 다섯가지는, 먹고 살만한 수준에서 조금부족한 듯한 재산,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 약간 부족한 용모, 자부심은높지만 사람들이 절반만 알아주는 명예, 한 사람에게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연설 솜씨, 라고 한다. 행복은 완벽한 정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만족스러운 부족함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이리라.


나는 율마에게서 한참 배우면서 산다.



식물생각 핸드북


간단 프로필:

국내 유통명: 율마

학명: Cupressus macrocarpa var.

영명: Goldcrest Wilma

생물학적 분류 (문/강/목/과/속): 나자식물문 소나무강 소나무목 측백나무과 싸이프러스속

원산지: 북아메리카


햇빛:

햇빛은 중요하다. 노지에서 쨍쨍한 햇빛 보며 살게 하는 것이 진리일 것 같다. 하지만 아파트 베란다에서 햇빛이 바로 치고 들어오는 샤시 앞에다 두는 정도로도 잘 살아간다. 그래도 어느 정도 환하다 싶은 느낌이 드는 방이나 거실에서는 잘 못살 거나 웃자랄 것 같다. 한편, 야외에서 햇빛을 강하게 쬐면, 잎들이 짱짱하고 색깔도 노랑빛 연두에 가까워지는 반면, 베란다로 들여놓으면 잎들이 좀 부들부들해지고 색깔도 초록빛 연두에 가까워진다.


바람:

율마에게 햇빛과 바람 중 무엇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람이라고 하겠다. 바람이 항상 드나드는 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는 율마 차지다. 뾰족뾰족 자잘한 바늘들이 무수히 모여있는 것 같은 율마는 그 무수한 잎들 속으로 바람이 잘 드나드는 걸 좋아하는 아이 같다. 그러므로 이따금의 환기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율마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잎의 순을 따주기도 하는데, 순따기하기 전에 바람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 같디. 풍성해진만큼 빽빽해진 율마의 잎들 속으로 바람이 잘 통하지 못할 환경이라면 순따기는 자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주기:

율마는 물을 좋아한다고 한다. 화원에 가서 물주기에 대해 물으면, 이틀에 한번 주세요, 일주일에 두 번 주세요, 등등의 조언을 쉽게 듣게 되는데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율마가 물을 좋아하는 건 맞지만, 과습은 더 싫어한다고 본다. 따라서, 개개의 율마가 사는 환경에 따라 물주기 횟수는 당연히 차이가 난다. 흙의 색깔로 마름을 판단하고, 손가락을 쑤셔봐서 속흙의 마름도 판단해야 한다. 겉흙이 말라보여도 속흙의 느낌이 척척하면 아직 물을 주면 안되고, 속흙이 축축한가 아닌가 헷갈릴 때 그 다음날 주면 된다. 나는 약간 물이 부족한 듯 키운다. 그리고 율마는 물마름에 젬병이라고 하여 물을 말리게 되면 살아나기 힘들다고도 하는데, 나도 간간이 물 주는 때를 놓쳐서 (특히 여름) 율마의 잎들이 맥을 못추고 아래 방향으로 휘어져 쳐지기도 하고 구루퍼라도 말은 것처럼 잎의 끝이 돌돌 말리기도 했다. 그런 율마를 발견하고는 식겁하기도 했지만 물을 주고 나면 다음날 율마는 빳빳이 살아났다.


내한성/월동:

내한성이 약한 편이라고 하는데, 내 보기에는 생각보다 강하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추운 한겨울을 거뜬히 보냈다. 참고로 나는 겨울에도 베란다 문을 조금 열어둔다. 월동한다고 굳이 거실로 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성장 속도:

꽤 잘 자란다. 매일매일 보고 있으니 크는 걸 잘 모르는데, 예전에 찍어놓은 사진과 비교해보면 엄청 자랐다는 걸 알게 된다. 일년에 30센티 정도는 자라는 것 같다.


번식:

삽목으로 주로 한다고 한다. 가드닝 까페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율마 삽목에 성공했어요, 라는 글들이 간간이 올라오긴 하는데, 나는 아직 삽목에 성공을 못해봤다. 단, 율마 삽목이 어렵다는 것은 대체적인 의견인 것 같으니 좌절하지 말 것. 그리고 쨔잔, 나도 지금 현재진행형으로 삽목이 성공중이라는 것. '성공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지난 5월초에 삽목한 10개의 율마 가지가 7월 중순경까지 살아있는 것을 보고 드디어 성공이구나 하고 화분에 예쁘게 옮겨심어줘야지 하면서 몇 개를 뽑았는데, 뽑아보니 뿌리가 거의 돋아나질 않아 있었다. 그러더니 화분에 옮긴 후 시들어서 떠나갔다. 다만 그 때 뽑지 않은 아이들은 아직 살아있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삽목한 포트를 플라스틱 받침에 담아두고 저면관수를 하되 최소한 4-5개월은 그대로 둬야 한다는 것이다. '성공중'인 율마새끼들을 가을에 뽑아볼 생각이다. 그냥 양재시장에 가서 삼천원짜리 새끼율마 포트를 사와도 되겠지만, 삽목 번식도 또다른 즐거움이다.


매력 포인트:

율마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다. 전남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이어 나무의 미니어쳐를 보는 듯 한 율마의 모양과, 율마에게서 나는 피톤치드라고 일반적으로 불리우는 향기. 율마 여러 아이를 주욱 늘어놓으면 숲길 같기도 하여 보기에 참 흐뭇하고, 일년내내 보여주는 초록빛 연두 색깔도 나의 안구정화에 크게 이바지한다. 두 손으로 율마의 잎을 아래에서 위로 주욱 쓰다음어서 코앞에 갖다대면 향기가 참 좋다.


유의사항:

물을 말리면 회생불능이라고 하지만, 나는 물을 말리는 것보다는 과습이 더 위험하고, 물보다는 바람의 부족이 더 해롭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나의 추천으로 율마를 구입한 친구가 있었는데, 집에 들어올 때마다 확 풍기는 율마의 향을 느끼고 싶다면서 커다란 율마를 꽤나 비싼 값에 들였으나 실패하여 율마를 따갑고 아픈 가시덩어리로 만들고야 말았다. 내 생각에 가장 큰 패인은, 아파트 고층이라 해도 도둑이 들 위험이 있으니 집에 사람이 없는 동안 창문을 열어둘 수가 없어 창문을 닫아놓았던 것이었다. 바람을 만끽하지 못하는 율마는 숨이 막혀 하는 것 같다. 살아있을 때는 쓰다듬을 때마다 상쾌한 율마 특유의 향을 풍기는 연두빛 가느다란 잎들이지만, 생명이 다 한 후에는 따갑기 그지없고 여차하면 손가락 살갗을 뚫고 들어갈수도 있는 가시가 된다.



보너스:

율마를 가지치기하거나 하여 율마 가지가 생기면, 작은 화병에 꽂아두면 좋다. 기록해두진 않았는데, 생전의 초록 그대로 한달반 정도 유지된다. 씽크대 선반, 식탁 위, 옷방, 등등 평소에는 식물을 키울 수 없던 공간에 두면 딱이다. 고마운 율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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