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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날다 Feb 25. 2016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역설의 도시, 로마

어디에나 있고 언제나 있는 인류의 역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고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했던가! 이처럼 자신만만하고 위풍당당한 도시가 또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로마를 나의 취향에서 제외시켜 버렸다. 너무 드높아서 너무 유명해서 모두가 인정하는 그곳을 나까지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 싶었기에...

 그런데 별 고민 없이 다녀온 생애 최초의 로마 여행에서 나는, 그간의 내 얄팍함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남들 아는 만큼은 안다며 버텼던 고집이 얼마나 속 빈 허식이었는지, 고작해야 남의 것 뺏고 훔쳐 이룬 약탈 문화라며 폄훼했던 고정관념이 얼마나 고약한 피해의식이었는지를...     


"NF F NS NC(non fui, fui, non sum, non curo)."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      


고대 로마인들이 묘비명에 새겼다고 하는 말이다. 그저 보고, 읽어서는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는 문장,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나는 이 알쏭달쏭한 문장 속에 숨은 행간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역설, 불가능한 이 일을 로마인이 이루었다는 이야기며, 또한 2천7백 년이라는 오랜 시간 인류의 모든 것을 시작하고 완성한 것은 다름 아닌 대제국 로마였다는 자부심이다.    

  

이에 대해서는 팍스 로마나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기번도, 일본의 정치사상가 미루야마 마사오도 동의하는 바일 것이다. 기번은 그가 살았던 18세기가 되기까지 로마제국만큼 인류가 풍요롭고 행복했던 때는 없었다고 주장-실제로 2세기 85년간 유지되었던 로마 5 현제 시대, 로마 자유민의 소득은 18세기까지 그 어떤 나라의 국민소득과 비교해도 높았다고 한다-했고 미루야마 마사오는 “로마의 역사에는 인류의 모든 경험이 들어 있다”며 같은 견해를 더했다.      


어쨌든 나의 생애 첫 로마여행은 안타깝게 짧고 터무니없이 가벼웠다. 도로, 수도, 경기장, 목욕탕, 건축물, 조각, 법과 제도 등등 2천7백 년 전 신들의 이야기부터 20세기 세계대전까지, 인류의 모든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도시, 로마를 보고 느낀다는 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해서 머지않은 때 나는 로마행 비행기를 다시 탈 것 같다. 아니, 탈 것이다.       

    

2천7백 년 전, 로마에서는...     


그리스-로마 신화라고 하지만, 기실 로마는 그리스 신화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다. 제우스가 쥬피터가 되고 아프로디테와 비너스가 이름만 다를 뿐인 사연이다. 그렇게 그리스를 사모했던 로마답게 건국신화 역시, 그리스로부터 시작된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고대 그리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손자들인 쌍둥이 형제들이다. 우여곡절, 늑대의 젖까지 먹고 자란 그들 가운데 선택 받은 이는 형 로물루스, 그가 팔라티노 언덕에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는 나라를 연 것이 B.C 753년이다.      

   

팔라티노! 적어도 서양의 역사를 두고 본다면, 그 모든 이야기는 2천7백 년 전, 이 곳에서 출발한 것이다. 말 그대로, 역사적인 장소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현장은 여느 동네 공원과 다름없이 평범하다. 그저 ‘BELVEDERE ROMOLO E REMO’가 고작인 간단한 표지판이 전부다.

구구절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 한 줄이 모든 것의 시작인 것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애써 보여줄 이유가 없는,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이것이 로마인 것이다.   

        

로마의 상징은 인류의 상징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막시무스는 팔에 새겨진 문신 SPQR을 지운다. 더 이상 로마의 시민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SPQR, 라틴어로  Senatus Populus Que Romanus의 약자다.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을 뜻하며 로마가 공화정 국가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지배했던 제정 로마,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 문구는 계속  쓰여지고 있다. 동전, 건축물, 맨홀 뚜껑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다.      

캄피돌리오 광장,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동상이 서 있다. 이곳에서 SPQR을 발견했다.  

로마는 왜 지금까지 SPQR을 쓰고 또 쓰고 있는 걸까? 선진적이었던 그들의 정치체제와 법제도에 대한 자부심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천 년 이상 대제국일 수 있었던 원동력, 견제에 충실했던 의회와 명예로운 의무를 다한 자유시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그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싶을 것이다. 시대를 넘어 역사를 건너 SPQR이 로마의 상징인 이유다.        

글레디에이터들의 일터이며 생존의 장이었던 콜로세움. 역사상 유일하게 죽고 죽이는 살인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현장이다. 게다가 그 모습을 동시에 4만 5천 명이 웃고 떠들며 즐겼다고 하니 대제국 로마에 타락과 부도덕의 혐의를 옴짝달싹 못하게 덧씌울 결정적 증거물인 셈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콜로세움은 지금은 없으며 앞으로도 없어야 할, 그래서 오로지 로마에만 있었고 영원히 유일한 온리 원(Only one) 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다.     

  

고대 로마의 모든 정치적 활동이 이루어졌던 포로 로마노. 원로원의 의사당과 재판소가 있었고 시저의 장례를 치렀던 장소다.   

        

만신전 판테온의 정면에는 M(ARCUS)·AGRIPA·L(UCI)·F(ILIUS)·CO(N)·S(UL)·TERTIVM·FECIT라는 문장이 쓰여있다. 집정관을 세 번 지낸 마르쿠스 아그리파가 세웠다는 뜻이다. 아그리파는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었다.      


로마 속 스페인광장. 괴테를 비롯한 유럽의 지성들이  사랑해마지않았던 거리다. 또한 로마의 휴일 속 오드리 헵번이 오고 갔던 수많은 명소 중 한 곳이기도 하다.           


결국 나 또한 세계 곳곳에서 온 모든 관광객들이 그러하듯, 트래비 분수에 동전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동전 한 개를 던지면 꼭 다시 로마로 돌아온다는, 믿거나 말거나한 이야기 때문에 말이다.           


               

<마음에 남는 글>     

 온화할 것,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결정한 일에 대해서는 흔들림 없는 태도를 고수할 것. 소위 명예에 관하여 헛된 허영심을 품지 말 것. 노동을 사랑하는 마음과 끈기. 공익을 위해 충언하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일 것.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대하고 각자의 가치에 어울리는 것을 나누어 줄 것. 언제 긴장을 풀어야 할지 경험을 통해 깨달을 것.               -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명상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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