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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달을 무심히 바라보다 떠오른

대상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 덜어내야 하는 정보나 지식.

by 코코넛


책을 읽다가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로 강하게 들어와서

창가로 갔다가 오랜만에 낮에 뜬 달을 봤다.

흐릿해서 겨우 달이라고 인지할 수 있을 정도의 낮달을......


잠시 창에 기대어서

특별한 감동도 없이, 멍하니 달을 응시하는 내 태도에 화들짝 놀랐다.


아, 내 감성이 너무 건조해졌나?


낮에 파스텔로 하얗게 그린 듯이 보이는 달을 처음 봤을 땐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보일 만큼,

내 마음이 신선함으로 출렁댔었다.

과학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일이라서

달은 밤에 나타났다 낮에 사라지는 밤의 상징물로 여겼었던 기억이다.

그리고 이후로는 낮달이 전혀 감동으로 번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내가 건조해져서라기보다는

당연함에 유난을 떨지 말자는 (어른의 발상?) 일종의 자제력에 기인했다.


그리고 책을 읽다 발견했던 한 부분에서 다시금,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관념이 깊이 관여한다는 점을 떠올렸다.

그래서 내 생각과 비슷한 두 사람의 대화를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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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



추상 표현 주의자 윌렘 드 쿠닝과 비평가 헤롤드 로젠버그의 대화를 보면,

미술의 특징이 무엇이며,

대상이나 현상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작가의 느낌이 주관적이므로 동일한 대상이나 현상도,

다르게 표현한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로젠버그 : 당신은 어떤 것을 어떤 식으로 보겠죠.

하지만 그렇게 보는 방식이 꼭 사물이 있는 그대로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막대기에 물을 넣어봐요. 구부러진 것처럼 보이죠.


드 쿠닝; 맞아요. 그게 당신이 보는 방식이지요.


로젠버그; 무슨 소리인가요? 진짜 구부러진 것이라고요? 물에서 꺼내 보면 금방 아는데,

마치 제가 잘못 봤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드 쿠닝; 누가 모르나요? 그렇지만 물속에 있을 땐 구부러진 겁니다.


로젠버그; 구부러져 보이는 것은 착시(illusion) 일뿐이에요.


드 쿠닝; 네, 바로 그 점을 제가 말하려는 겁니다. 모든 회화는 하나의 환영(illusion)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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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렘 드 쿠닝



작품을 감상할 때 한 작품에 할애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보나 지식과 같은 사족을 모두 떼어버려야 오롯이 작품과 대화가 가능해진다.


이런 현상을 누군가는 느낌의 미학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굳이 미학이라는 언어까지 동반하지 않고 나는

자연스럽게 작품과 친구가 되는 길이라고,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내 안에 숨 쉬는 미의식을 일깨우는 길이라고,

성찰하고 사유하고 반추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다수의 사람들은 정보에, 혹은 지식에 기대어서

작품을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미술감상은 스스로 감상의 폭을 제한하는 습관이다.


자기 자신을 믿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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