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고 또 까도 껍질처럼 느껴지는 양파의 형태처럼 마음도 기억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상처가 될 그 어떤 요인도 없는 무덤덤한 오늘.
바람이 강하게 불고 기온도 쑥 내려가서인지
마음에도 찬바람이 불어온 것일까?
지난밤에 내린 눈을 쓸어내듯이 마음에 깃든 냉기를 쓸어내리기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일에 매달렸다.
그러는 사이에 어둠이 내렸고 배가 고팠다.
살아있다는 일은 이처럼 사소하면서도 엄청난 일이고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듯하다.
리처드 세라의 시간의 문제
길고 긴 겨울 방학을 다채롭게 구성하지 않은 일상이
쉽게 외부의 변화를 지각하고 마음에 틈을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위의 리처드 세라의 <시간의 문제>라는 작품에서처럼
시공간의 습관화된 지각이 한순간의 변화 앞에서
울렁증이 생기고 불안하게 흔들리는 지각으로 바뀌는 듯하다.
단단한 것이 유연한 것보다 더 쉽게 깨지는 것이다.
살가죽 구두- 손택수
세상은 그에게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맨발로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에게
검은 가죽구두 한 켤레를 선물했네
부산역 광장 앞
낮술에 취해
술병처럼 쓰러져
잠이 든 사내
맨발이 캥거루 구두약을 칠한 듯 반들거리고 있네
세상의 온갖 흙먼지와 기름때를 입혀 광을 내고 있네
벗겨지지 않는 구두,
그 누구도
벗겨 갈 수 없는
맞춤 구두 한 켤레
죽음만이 벗겨줄 수 있네
죽음까지 껴 신고 가야 한다네
위의 시를 읽으면 많은 사람들이 고흐의 구두 한 켤레를 떠올린다.
차원은 살짝 달라도 수긍이 되는 연상이다.
그러나 나는 이 밤에,
바람이 부는 소리가 마치 굶주린 야생동물의 울음 같다고 느껴지는 밤에,
손택수의 <살가죽 구두>를 감상하다 보니,
냉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반성이 피어났다.
그래서 고흐의 구두 한 켤레 대신에
서도호작가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을 떠올렸다.
마음 안에는 아집 속의 고집 속에 아집 속에 고집이 있어서
허물어내고 또 허물어도 남아있는 아집이,
남아있는 고집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걸림돌이기도 하다.
작가가 생각하는 가정도 어쩌면 집이라는 이중적인 재미,
혹은 아집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서도호 작가의 인스톨레이션 작업이 아닌 이미지로 감상하는 밤이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직관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본다.
*서도호 작가는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이러고
작품 제목을 House 가 아닌 Home이라 붙였다.
서도호 <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서도호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