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로 끝맺기는 아쉬운,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추억
길고 긴 겨울방학의 끝자락,
교수님 중 한 분이 마지막 추위를 잊으라고 보내주신,
아니, 어쩌면 새 학기에도 힘내라고 보내주신 선물을 받았다.
양양엔 한 해에 한 번씩 갈 기회가 있었다.
주로 쏠비치에서 시간을 보냈기에 <능이 칼국숫집>은 가본 적이 없었다.
들깻가루 향과 능이버섯 향이 진한 칼국수는
즉석요리처럼 끓이기만 하면 되어서 쉽게 식당에서 먹는 맛을 집에서 즐길 수 있다.
택배 상자엔 능이 칼국수 2개와 감자옹심이 3개가 있으니
집에서 양양의 맛을 5일이나 즐길 수 있다.
오늘은 내가 물의 양을 잘못 기억해서 짭조름하게 먹었는데도 맛있었다.
선한 기운을 이곳저곳으로 보내시는 아름다운 분의 손길이
나에게 당도해서 맛본 능이 칼국수의 명가에서 발송한 칼국수는
양양의 바닷가, 파도 소리, 바람 소리, 아름다운 기억까지 데려왔다.
양양의 어느 해안가에서 누군가의 추억을 몰래 엿보았던
사진 한 장에도 강원도의 추억이 모락모락 피어나는데
시각이 아닌 미각과 후각이 몰고 오는 향수는
이어지고 이어지는 기억의 행렬이 길 수밖에 없다.
배가 부르니 졸음과 비슷한 나른함이 밀려왔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무럭무럭 자라는 그리움으로
어느 사이에 나의 기억은 넘실넘실 파도를 타고 흘러 흘러
해이 스팅의 해안까지 가서 발 밑으로 펼쳐진 흰색 클리프를 바라보고 있다.
도로에서 절벽까지의 사이로 펼쳐졌던 녹색지대(풀밭인지 잔디밭인지 가물가물)를
자전거를 타고 달렸을 때는
<ET> 포스터의 한 장면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낭만적이었다.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실재를 파악하는 점에 있어서
예술가는 과학자나 철학자, 도덕론 자나 신학자 등과 비슷하다.
예술이란 의의(significance) 있는 활동을 하는 다른 인간의 기획 중의 하나이며,
그들과 같이 예술가는 인간이 실재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의 관심으로부터 의의를 끌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술의 기본 특성을 간과한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그것이 지닌 인간적 의의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는 일이다.
- T.M. 그린
모네의 노르망디 해안
사진첩을 뒤지면 쏟아져 나올 많은 장면이 있겠지만,
배가 부르니 사진 찾는 일도 포기하고 기억에만 의존한다.
다만 세븐시스터즈의 해안과 노르망디의 해안이 비슷한 감성이라서
사진첩을 뒤지지 않고 모네의 작품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눔은 이렇게 감동으로 이어지는 파도와 같은데
나는 요즘 무엇을 나누고 있을까? 고민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