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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넛 Sep 05. 2024

백설 여왕

누군가가 하지 않던 행동을 할 때엔 숨은 뜻이 있을 수 있다.

1.  

 

카자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앞에 섰다. 검은 사각형 안에 아주 가는 선이 엉켜있는데 선은 한 줄 같은데 색이 여러 가지다. 선이 하나인지 여럿인지 자세히 보려고 나는 작품과 조금씩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그러다 갑자기 검은 사각형 안으로 들어간 것인지 방향을 잃어버렸다. 사방이 캄캄한 곳, 위아래 여기저기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을 울리는 발소리가 뚜벅뚜벅 , 뚜벅뚜벅 둔탁하지 않게 울리는 것으로 미루어 여자의 하이힐에서 울리는 소리 같다. 소리가 울림이 되고 울림이 메아리가 되어 다시 울리다 소리는 사라졌다. 소리가 사라지니 더 칠흑같이 어둡다. 시간마저 먹어버린 어둠의 한쪽 귀퉁이에서 작은 사각형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그 사각형이 어둠을 타고 흐르듯 둥둥 떠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사각형에 눈과 코, 입을 그린 듯, 평면적이면서 모난 돌과 같은 얼굴이 점점가까이 다가오더니 배경을 모두 지웠다. 내 눈동자에는 그 사람의 얼굴로 가득 찼다. 어쩌면 처음부터 배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같다. 사각형의 머리통이 마치 산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등산객처럼 멀어지면서 작아졌을 때도 배경은 검은색 파스텔로 칠한 위에 또 덧칠한 듯이 검은 농담이 조금씩의 차이를 드러내는 평면이었다. 평면은 지루하고 심심하다. 검은색과 검은색 사이의 좁은 길로 걷는 게 진짜 나인 걸까? 답답했다. 아는 것이 없어 답답했고,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어둠의 농도가 일정하지 않은 평면이 스스로 입체로 바뀌는 듯이 현기증이 일렁인다. 이건 또 뭐지? 생각하려고 시도하니 더 어둡다. 


시간이 흐른 것일까 멈춘 것일까. 중력이 느껴지지 않는 지점에서 알 수 없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줌 인에서 아웃으로, 카메라 렌즈가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주었을 때야 비로소 드러난 배경처럼, 배경이 선명해지자 막연한 두려움이 있던 자리로 궁금증이 들어왔다. 황금빛의 법원 로고가 벽에 붙어있는 배경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앉은 세 사람이 근엄하고 숙연한 표정, 아니다, 감정이 없는 마네킹과 같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 세 사람 중 가운데에서 넓은 면적을 자치한 채로, 앉아있는 자가 조금 전에 두려움과 공포를 맛보게 했었던 바로 그 사각형의 얼굴이다. 감정은 집에 두고 왔거나 주머니 속에 깊이 찔러 넣은 것 같은 인상의 주인공인 사각형의 얼굴이 법정 최고의 권력자인 듯했다.


그들 중 한 사람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어둠에 오래 머물다 만난 첫 번째 빛이 눈빛이었다. 첫 눈 맞춤이다.  그때 나는 눈빛으로 질문을 했다. 제가 왜 이곳에 있나요? 저를 왜 불렀나요? 저는 정직하고 도덕적인 시민입니다. 길에다 쓰레기를 버린 일도, 주정차구역이 아닌 곳에다 주차한 적도, 남의 것을 훔친 일도 없었을뿐더러 음식물쓰레기도 최소화하는 생활을 했으며 남을 속인 일...... 그 지점에서 순간 나는 멈칫했다. 가족이나 주변인들에게 자잘한 거짓말을 많이 했고, 가끔은 주변인들의 흉도 봤고...... 또, 또,..... 잘못을 떠올리려고 노력하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잘못을 하면서 살았다는 자각과 함께 땀이 났다. 


조각도를 처음 손에 쥔 조각가가 사각형에서 귀퉁이를 조금씩만 깎아 낸 듯한 얼굴의 남자 눈빛이 순간적으로 반짝 빛을 발했다. 그는 내가 겁을 먹었다는 것, 몸에서 땀이 난다는 것을 인지한 것 같았다. 냄새로 아는 걸까? 그들과 나의 거리는 땀이 보일 정도로 가깝지는 않았다. 살아오면서 지었던 죄를 낱낱이 들킨 듯하자 온몸을 뒤덮은 솜털이 모두 일어섰다. 무서움과는 조금 다른 찜찜하면서도 억울하고, 징그러워서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또 기가 막히게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불러낸 감정이다. 모호한 상황이라 대처할 방법도 찾을 수 없는 두려움이랄까, 가늠이 어려운 상황에 있는 공포랄까 


전신으로 번진 여러 종류의 감정은 뜨겁고 강렬하고 날카롭게 몸의 이곳저곳을 마구 찔렀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니 검사와 검사의 맞은편에는 배심원들이 앉아있는데 그들의 표정 역시 정지화면처럼 눈동자까지 멈춰있었다. 순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모두 죽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지금 시체들 사이에 있는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나는 죽은 것일까? 죽은 사람도 산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내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왜 죽은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생각은 앞과 뒤가 없는 편린, 시퀀스처럼 잘린 상태에서 확장되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난 저승사자들 앞에 있는 걸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지은 죄에 대한 심판을 하려는 걸까?

 

저승사자는 인형과는 다르지 않을까? 저들은 왜 움직이지도 않고 말도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자 그들이 플라스틱 인형으로 느껴졌다. 그들을 플라스틱 인형이라고 느낀 것은 어쩌면 내가 피해자가 아닌 피의자라는 팻말이 놓여있는 자리에 앉아있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확고해졌다. 생소함에서 도드라진 패턴과 같은 착시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상황을 전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법정에서 그것도 참관인이 아니라 피의자로 앉아있는 이상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까? 불안하면서 불쾌했다. 


그때 피해자 좌석에 앉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둠을 배경으로 유난히 하얀 얼굴, 아는 얼굴이었다.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한 학년 아래인 대학교 후배라는 기억이 선명해졌다. 후배인 것까지는 기억났는데 이름은 떠오르지 않았다. 선배와 후배가 피의자와 피해자로 만났다. 어떤 경우로 우린 이런 관계가 되었지?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만날 일이 없었던 후배와 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후배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녀의 눈빛은 담담했지만 차가웠다. 냉소 같기도 했고 무시 같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자초지종을 물어보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숨을 막혔다. 나는 휘청대는 몸을 넘어지지 않으려고 가누다가 무엇인가를 잡었다. 그때 잠에서 깨어났다. 얼마나 오랜 시간 꿈에 시달렸던 것인지 온 땀으로 젖어 있었다. 마치 잠옷 상태로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만큼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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