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선이는 두 개의 알이 든 딸콩 같았다.
4.
차분하게 지선이를 기다릴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소리를 잘 듣고 냄새도 잘 맡는 강아지처럼 지선이가 도착했음을 감각적으로 느꼈을 수도 있다. 지선이가 노크를 하기도 전에 문을 열고 나온 것과 거의 동시에 지선이가 엘리베이터 문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환한 미소와 함께 양손을 위로 올리고 흔들며 복도를 걸어오는 지선이를 보자마자 몇 시간 동안 의혹으로 가득 찬 세상에 억류됐었던 마음이 사라졌다. 나를 괴롭히던 불안과 의혹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나자 나는 다시 안락하고 편안한 공간의 평화를 느꼈다. 순간 지선이가 아르헨티나 출신의 화가 루치오 폰타나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미술가라서 그런 연상작용이 일어난 것일까? 그녀에게 다가가면서 나는 평면인 캔버스를 나이프로 찢어 공간을 만든 루치오 폰타나와 지선이가 닮은 점을 떠올렸다. 그래 맞다. 타인에게 인식의 변화를 체험하게 한 부분이 닮았다.
나도 지선이를 흉내 내듯이 지선을 향해 양손을 흔들었다. 신기하게도 손을 흔드는 동작하나로 마음이 들떴다. 모르는 사람이 내 모습을 봤다면, 연인들이 만나는 장면처럼 보였을 것이다. 미로와 같이 이어지는 시간과 시간의 켜 사이에서 출구를 찾지 못해 오락가락하던 내가 지선이의 출현과 동시에 그곳에서 빠져나와 앞과 뒤, 좌우가 존재하는 현실공간으로 돌아왔으므로 나는 기쁘고 반가웠다. 존재 자체로 사람이 사람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생각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는데 그럴 수 있음을 오늘 알았다.
"온니! 방에서 기다리지 왜 나와서 기다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지선이는 내 팔에 자신의 손을 얹고 눈을 45도 왼쪽으로 기울어진 초승달처럼 만들면서 웃었다.
"지선아 오버하지 마! 나는 단지, 네가 도착하는 시간을 계산해 보고 막 문을 열었었는데 어쩌다 보니 맞아떨어진 것이야."
죽었다 살아 돌아온 서방을 마중하는 여인처럼 내 행동이 일반적이지는 않았음을 뒤늦게 인지하고 살짝 민망했다.
"하하 언니 코가 개코구나? 아니라면 나와 만난 것이 벌써 몇 달 전의 일인데 어떻게 내가 도착한 시간을 정확히 맞출까? 아무리 봐도 언니는 여러모로 참 신기해!"
통통 튕기는 발랄함이 오십이라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일까? 지선이는 묘령의 여자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후배다. 나를 신기하다고 표현하면서 호텔방 안으로 나보다 먼저 들어섰던 지선이는 건성으로 한 번 휙 둘러본 후 뒤돌아서
“언니, 내 가방은 언니가 알아서 아무 데나 놓아줘. 나는 먼저 샤워를 하고 싶어. 이 꾀죄죄한 몰골에서 빨리 벗어나 환골탈태해야 할 듯”
가방을 내 손에 쥐어주는 것과 동시에 얼굴을 나에게 가까이 들이밀면서 말하는 지선이 때문에 기겁했다. 잘못하면 입맞춤이 되었을 정도로 지선이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 온 후 멈추었다. 당황한 내 얼굴을 보더니 지선이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짓궂은 웃음이 번진 지선이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정말 눈곱만 겨우 떼어내고 나온 듯이 기미와 주근깨로 얼룩덜룩하고 꾀죄죄해 보였다. 그녀의 작은 가방은 그녀의 세계를 모두 쓸어 담은 우주처럼 묵직했다. 무거운 아령을 든 손처럼 늘어뜨린 자세로
“너의 몰골을 보니 그래야 할 것 같다. 어떻게 씻지도 않고 시내를 돌아다닐 수 있어? 나는 집 앞 슈퍼에 갈 때조차 립스틱이라도 바르고 나가는데, 너는 정말 용감하다!”
라고 말했는데, 내 말은 그녀의 뒤통수를 따라가다 문에 꽝 부딪쳤다. 그녀는 이미 내 시선이 차단된 욕실로 몸을 감추었고 뒤이어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문 틈으로 새어 나왔다. 사뿐사뿐 욕실에서 흘러나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왔다 갔다 하다가 나는 그녀의 가방을 열어 옷을 옷장에 걸어주려고 의자에 놓였던 가방을 동그란 탁자 위로 옮겼다. 멈칫, 동작을 멈추었다. 스스럼없는 사이라고 쳐도 지선이의 가방을 여는 것은 실례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선이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등장하길 기다리면서 의자에 앉아 비치된 안내서들을 읽기 시작했다. 어제는 호캉스를 시작했다는 설렘에 빠져서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호텔 이용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 숙지하면 좋은 정보들이 가득했다. 정보들 가운데 아프터눈 티를 즐길 수 있는 클럽 라운지에 마음이 쏠렸다. 읽다 보니 메뉴에 <아프터눈 티 afternoon tea>가 보였다. 반가웠다. 메뉴 속의 활자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런던의 호텔로 이동하게 했다.
3년 전 가을, 남편과 유럽여행을 했었다. 첫 도착지다 런던이었는데, 그곳에 머무는 일정 속에서 선명하게 각인된 기억 하나가 바로 이프터눈 티와 연결되었다. 피카딜리서커스에 소재한 리츠호텔의 아프터눈 티가 유명하다고 친구가 추천해서 런던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국에서 예약했었다. 친구가 왜 추천했는지 서빙하시는 분을 보자마자 확인했다.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우아한 예의>의 진수를 경험하고는 바로 친구의 추천은 훌륭했다고 생각했었다.
연세가 50세에서 60세 정로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호텔 종업원의 복장이 제복을 입은 장교같이 멋졌고 그분의 절도 있는 동작 하나하나에 공손한 예의가 가득 담겨있었다. 서비스를 받는 사람을 정말 왕이나 여왕으로 모시는 듯한? 신분이 급상승하는 기분이 들게 헸었다. 삼단으로 된 금 프레임에 흰색 접시들도 고급진 느낌이었고 접시 위에 층마다 다른 종류의 핑거푸드가 예쁘게 담겼다. 제일 밑에 칸엔 속이 든든해질 수 있는 샌드위치와 스콘이 있고 두 번째 층에는 달달한 케이크조각들 그리고 제일 위에는 케이크보다 더 달고 가벼운 디저트가 모양과 색으로 침이 고이게 만들었었다. 눈으로만 맛있는 게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이 호텔에서 리츠호텔에서 받은 감동과 그때의 서비스를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기대로 기분이 상승곡선으로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라운지의 서비스에 대해 읽고 잠시 추억에 빠져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지선이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와우, 언니! 지금 누구를 상상하는 거인? 사랑에 빠지셨네 빠지셨어. 표정에 쓰여 있는 내용은 막 고백을 받은 분위기인데? 말해봐 언니! 내가 샤워하는 동안에 형부와 통화로 사랑의 밀담을 나눴지? 언니의 눈에서 행복이 뚝뚝 떨어지는데?"
그녀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툭툭 털며 말했다. 군인인 장교의 머리카락보다 길이보다 살짝 길 듯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헤어드라이기 없이도 말리기에 수월하고 간편해 보였다. 나는 그처럼 대담한 헤어스타일은 해본 적도 없다. 남편이 긴 헤어스타일을 좋아해서 내 헤어스타일은 남편과 만난 이후 줄곧 간 단발, 어깨 선에 닿는 단발을 유지했다. 더 길면 관리가 힘들어서 남편의 기호와 내 편리를 고려한 헤어스타일이다.
"아휴, 아니야, 너 오기 전에 통화시도는 했었는데 받지도 않고 툭 끊기더라. 내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면, 그건 아 호텔 안내서를 읽다가 이 호텔 라운지에서 아프터눈 티가 있어서 런던에 갔을 때 맛보았던 추억을 소환해서 흐뭇했을 거야. 너도 런던에 가봤지?"
손사례까지 치면서 그렇게 말한 후 마지막에 질문을 덧붙인 걸 바로 후회했다. 이렇게 질문하고 대답하다 정작 내가 알아내고 싶은 궁금증에 대한 질문도 하기 전에 지선이가 시간 없다고 가버릴 수 있다. 내 질문을 들으면서 지선은 가운을 훌러덩 벗고 알몸으로 자신의 가방에서 면 원피스를 꺼냈다. 신기했다. 처녀인 그녀는 내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것이, 창피하지도 않은 듯이 편안해 보였다. 중년의 몸매 같지 않게 예쁜 자신감에서 드러나는 행동일 수도 있다.
"몇 번 가봤었지. 런던에서 그룹전도 한 번 있었거든. 전시를 위해서 갔었을 땐 한 달 넘게 머물러서 런던 구석구석까지 두 발로 찍고 다녔었어. 런던은 정말 걷기에 최적인 도시인 것 같아."
그녀와 자꾸 런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본론에 닿기가 어려워질 것만 같아서 나는 지선이의 대답과는 동떨어진 엉뚱한 말로 대화의 물꼬를 돌렸다. 은연중에 튀어나온 질투와 닮은 본심이었다.
“너는 어쩜 몸매가 이렇게 예쁘니? 20대 몸매다 얘.”
지선이의 얼굴은 미인까지는 아니지만 개성 있는 얼굴이라 한 번 보면 쉽게 잊을 수 있는 얼굴은 아니다. 그러나 몸매는 마네킨과 견줄만한, 군살이 하나 없는 아름다운 곡선으로 이루어졌다. 부러움이 묻은 눈길을 그녀의 몸에 고정시킨 채로 그녀에게 말했다. 남편 앞에서 알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지금도 몸을 꽁꽁 싸매고 다니는 이유 중 하나가 알몸이 부끄럽기보다 어쩌면 몸매에 자신이 없어서 일 수 있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이 몸매 유지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잠시 방심하면 나도 다시 군살이 마구 늘어나는 체질이야 언니.”
지선이는 몸매를 뽐내듯 제자리에서 한 바뀌 빙그르 돌면서 말했다.
“어떻게 관리해? 운동하는 거야?”라고 묻자
지선이는 젖은 수건을 다시 욕실에 갖다 두고 와서 내 옆에 바짝 붙으면서 팔짱을 낀 후
“언니 우리 뭐라도 먹으면서 이야기하자. 기상한 지 한 시간이 넘었다고 허기지네.”라고 내 질문을 무시한 채로 다른 말을 했다.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가 안 되었다. 라운지는 12시부터 운영한다고 읽었던 것이 방금 전이었다.
“참은 김에 조금 더 참았다가 라운지로 올라가서 맛있는 아프터눈 티를 먹고 마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배가 많이 고픈데. 어제 술 마시면서 안주까지 먹으면 칼로리가 너무 높아지니까 안주를 입에도 안 댔거든. 그래서 허기지는 듯해. 술은 칼로리만 높지 주린배를 채워주지는 않으니까. 하하하 칼로리가 높다는 걸 알면서도 알코올을 끊을 수 없어. 영혼을 배부르게 해 주거든.”
그녀의 말을 듣고 나는 어제 입실할 때 보았던 웰컴 박스의 초콜릿이 떠올라 그 상자를 갖다 지선에게 주었다.
“우선 이것으로 너의 위장을 속이는 것 어때? 이 초콜릿 맛있어 보이기도 하고.”
지선은 내가 건넨 상자를 열어보더니 냉큼 하나를 입 안에 넣고 말했다.
“언니, 기계나 사람이나 꾸준하게 관리한 것과 관리하지 않은 것의 차이는 10년 이상이 지나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아. 물론 외모뿐 아니라 내면도. 내가 언니를 좋아하는 이유도 언니는 전업주부지만 자기 관리를 잘하는 여자야. 언니는 스마트해. 어떤 때는 전업주부 맞아? 하고 놀랄 때도 가끔 있거든.”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깨물어 먹지 않고 입 안에서 녹여 먹는 지선을 보면서, 나는 꿈에서 나타났던 후배가 어떻게 사는지 소식통인 지선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꿈에 나타났던 후배 이름을 떠올리려는데 여전히 생각나지 않았다.
"언니! 내 말 듣고 있어? 내가 지금 언니를 높이높이 띄우는데 반응이 왜 그래?"
그제야 내가 내 생각 속으로 잠시 들어가 있었음을 깨닫고 지선이를 보면서 피식 웃어주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아이를 알아내기 좋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아, 미안해, 내가 잠시 지난밤에 꾸었던 꿈에서 봤던 애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이름을 기억해 내려다 그만 네가 하는 이야길 듣지 못했네. 아, 어쩌면 너는 그 애를 알지도 모르겠다. 지선아, 있잖아 너의 동기 중에 아주 막돼먹은 친구, 이름이 뭐지?”
말을 하고 보니 내 말이 이상했다. 왜 그 아이를 막돼먹은 아이라고 했을까? 지선이는 고개를 돌리 나를 멍하니 쳐다본 다음 내 질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막되어 먹은 친구? 친절한 금자 씨가 아닌 막 돼먹은 영애 씨? 하하하 언니 질문이 너무 이상해. 구체적으로 말해야 기억나지. 언니와 동기야? “
”아니, 너와 동기일걸? 아니 한 학년 더 아래인가? 글쎄, 그게 말이야 오늘 아침에 일어나기 직전의 꿈에서 그 친구가 나타났었거든? 그때만 해도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났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생각나지 않아 “
구체적인 꿈 이야기를 지금 꺼내면 지선이가 편하게 먹지 못할 수 있다는 염려가 기저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불길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선명하지는 않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지선이가 호텔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녀와 얽혔던 일과 그녀의 행동들이 많이 떠올랐는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 피곤하게 기억나지 않는 사람 억지로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말아 언니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니까 생각나지 않는 것이야. “라고 말했다.
정말로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오히려 덜 불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내 남편의 전여자 친구이었다는 기억이 떠오른 상태라 지선이 앞에서 더 망설이게 된다. 망설여지면서도 어떤 정보라도 그녀에 대한 것을 캐고 싶은 욕구는 오늘 안에 그녀의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내 기억으로 우리 과에서 유명했던 친구, 예쁘고 법대생이나 경영대생들에게 훨씬 관심이 많던 애, 왜 있잖아 늘 남자가 바꾸던 그 아이. 그녀에 대한 자잘한 소문까지 기억이 났는데, 정작 이름은 떠오르지 않네?"
나는 용기를 내서 그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 순간 지선이의 낯빛이 약간 당황한 듯 바뀌는 걸 눈치챘다. 지선이는 내가 누굴 알고 싶어 하는지 분명히 알아들은 것 같다. 그 순간 알았다. 지선이가 그동안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하다가도 언제나 말을 삼켰던 기억이 떠오른 것과 동시에 지선이가 감추고 있었던 게 바스락 깨지는 소리처럼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 언니가 말하고자 하는 친구가 한미애?"
지선이의 입에서 <한미애>라는 이름이 나오자 기억이 더 뚜렷해졌다. 그런데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지선이의 얼굴이 갑자기 무안해하는 듯하기도 해서 묘했다. 그런 작은 변화를 목격하자 지선이가 땅콩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겉껍질은 살짝 건드리면 깨졌지만 속 껍질은 좀체 벗기기 어려운 땅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