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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넛 Sep 12. 2024

백설 여왕

지웠던 기억이 현실에서 함께 살았다

2.


지웠던 얼굴, 지웠으므로 기억나면 안 되는 얼굴, 완벽하게 지웠기에 잊고 살았던 그 얼굴이 기억을 떠나 무의식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불쾌한 꿈이다. 느닷없이 그녀가 나타난 게 불쾌했고, 만난 장소가 법정이었던 게 왠지 나쁜 징조 같다.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녀를 순식간에 알아봤다. 이십 대 때와 변한 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예쁜 얼굴, 세월이 비껴간 듯한 느낌은 현실이 아니어서였겠지? 나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을 분 단위로 한컷한컷 오려서 이어 붙인 듯한 아줌마가 거울 안에 있다. 초라했다. 눈가의 주름을 애교주름이라 여기면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그 주름이 신경을 날렵하게 끌어당겼다. 


시간의 켜가 쌓인 위로 새로운 기억들이 덮여서 밑으로 밑으로 아득한 지점까지 밀려났을 이십 대의 앳된 얼굴로 불현듯 꿈에 등장한 그녀. 이유가 뭘까? 내가 가족의 일에만 신경 쓰느라고 스스로를 관리하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보낸 일종의 경고장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다른 방법도 많은데 홰 하필 꿈을 통해서, 그것도 기억에서 일부러 지운 후배를 통해서 전달한 것일까? 아귀가 맞지 않는 가구를 이어 붙이듯이 생각을 꿰어 맞추려니 불안이 알 수 없는 곳으로 나를 밀어낸다. 이참에 회개하고 종교를 가져볼까? 거울 앞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다 다시 방으로 되돌아왔다. 침대 위의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먼저 단정하게 개키고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창밖을 봤다. 


주차장으로 변한 듯 차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없는 도로가 답답했다. 꿈을 잊으려고 창밖의 세상으로 신경을 모았던 것인데, 창밖 세상도 답답하게 느껴지긴 매 한 가지다. 사람이 세운 도시의 아침 풍경에 어떻게 주인공인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건물과 각종 차들만 보이는 걸까?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이나 차 안에서 고여있는 공기를 마시면서 무언가에 쫓기는 중일까? 21세기는 사물이 주연이고 사람이 조연인 연극무대일까? 나는 아직 꿈에서 깨어난 게 아닌가? 갈피 없이 생각이 이리 튀었다 저리 튀기를 반복해서 심란했다.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잔에 따른 후 벌컥 마셨다. 아주 잠시 차가운 물이 나를 생각에서 풀어놓았다. 생각에서 신체로 느낌이 잠시 이동한 순간은 정말 현실 같았다. 그러나 그 시원하고 짜릿한 감각은 순간으로 끝났다.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 그녀와의 접점이 단 한 가지도 없었다는 기억은 오류일까? 동창회에서도 난 그녀를 봤던 기억이 없다. 동창회에 왔던 친구들이 주고받던 대화를 통해 그녀가 대학병원 의사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었던 것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지난밤, 꿈속에서의 상황은 어떠한 상상을 대입해도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우리 두 사람을 엮을 수 있는 일은 아예 없다. 그래 개꿈이다. 불쾌한 개꿈. 느닷없이 꿈으로 방문한 그녀가 끌고 온 찜찜함과 궁금한 기분을 밑으로 가라앉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현재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꿈을 씻어 버리기 위한 목욕재계처럼 샤워를 했다. 손에 만져지던 거품이 푹 꺼지면서 미끌미끌한 느낌만 남기고 사라지자 거품은 물질이 아니었지라는 생각과 함께 퍼뜩 정신 차렸다. 존재했으나 드러나지 않은 무엇인가를 발굴하는 역사학자처럼 나는 다시 기억을 헤집었다. 집요하게 파헤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녀를 만난 장소가 왜 법정이고, 갑자기 그녀는 무슨 연유로 나를 고소했는지. 현재 추측이 불가능한 꿈이 지시하는 발향을 먼저 찾아야 한다. 대학교 때의 기억은 사건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될 지도일 듯해서  나는 몸을 말리고 옷을 갈아입는 순간에도 대학교 때의 기억들 사이를 오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 얼굴은 왜 선명하게 기억났을까? 예뻐서? 그녀가 내 시선을 잡아당긴 이유는 무엇이었지? 


기억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대학교 때의 일들을 들추고 또 들추었다. 시간여행의 시작은 그녀의 출현이었지만, 대학교 다닐 때의 풋풋한 감정이 되살아나는 기쁨도 불안 사이로 끼어왔다. 불안과 기쁨이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오래 머물면 정신병자가 될 듯해서 나는 급하게 단정 지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오해가 생길 만큼 가까웠던 적은 없었다. 30년이 훌쩍 넘은 오래된 과거라 기억에서 삭제된 것은 아니다. 기분 나쁜 기억들은 슬그머니 오려내면서 살아가는 습관이 모든 인간의 이기심이라면 지웠을지도 모른다. 알 수 없다. 그녀와 내가 얽혔던 일은 선명하지 않았지만. 학과 내에 번졌던 그녀와 관련된 소문은 하나둘 떠올랐다. 


기억이 엉켜서 맞는 기억인지 틀린 기억인지 장담이 불가능한 오래된 기억이고 그녀의 이미지로 굳었던 소문들 역시 소문이었기에 진실인지 거짓인지 정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산만했다는 것과 난해한 생활을 하는 후배였다는 편견은 직관과 그녀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의 총체였으므로, 어울리고 싶지 않은 후배였다. 학과의 규율이나 관습을 무시하는 행동들을 거침없이 해서 그녀는 눈에 잘 띄었고 소문의 중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 소문의 중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스쳤다. 아니라면 매 학기 남자친구를 바꾸고 또 남자친구가 생기면 제 자취방에서 거의 함께 살다시피 한다는 것을 본인 스스로 학과에 흘리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학과는 경영대학 건물과 법대건물 사이에 있었다. 여학생이 유독 많은 미대 건물을 주시하는 남학생들이 많았고 학생식당은 경영대학 건물에 있었으므로 과는 서로 달랐어도 우리들은 서로 잘 아는 사이로 발전했었다. 학교 내에서 술렁이는 소문은 학생식당에서 많이 발생했었다. 서로 얼굴과 이름을 대조하면서 말하기가 쉬운 장소라서였을까? 예쁘면서도 톡톡 튀는 그녀는 자연스럽게 우리 과에서 제일 유명한 인물이었다. 예쁘면 많은 게 허용되는 나이였고, 외모가 나머지 모든 요소보다 우월한 조건인 나이였을 때다.


그녀를 둘러쌌던 소문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분량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법대생이었던 남편이 복학했던 3학년 1학기에 그녀와 남편이 사귄다는 소문이 학과를 떠들썩하게 했던 기억이 그때 떠올랐다. 그랬다. 그녀가 남편의 전 여자친구가 맞다. 그녀와 어울리기엔 남편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갑자기 감기몸살이 시작되는 것처럼 몸이 으스스했다. 그때 남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첫눈에 내가 남편에게 호감을 느껴서였을까? 혹시 내가 그녀를 관찰 아닌 관찰을 했었던 게 아닐까? 그녀가 나보다 세련되고 예쁘고 적극적이라 속으로 시기심이 있었을까?


그녀는 화려하면서 예뻤고 자존감이 높았다. 그녀와 같은 사고의 소유자가 요즈음 많아진 것으로 미루어 그녀는 시대를 앞질러 살았었던 것 같다. 여자라는 울타리에 자신을 가두기보다 울타리 자체를 없애버렸던 그녀. 세대교차가 이루어지듯이 관념도 교체되어야 한다면서 당돌했었다. 교우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고, 원칙이나 규칙이라는 것은 상자 속이 비어있음을 감춘 포장이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던 그녀. 그래서 그런 그녀가 불편했었다. 온순하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에도 바빴던 나와 성향이 너무나 달라서 피했었다. 어쩌면 내가 그녀를 기피한 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먼저 기피대상자로 찍었을 수도 있다.


나와 한 발 떨어진 거리에서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던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이후부터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지워졌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 3학년 2학기, 내가 남편과 교재를 시작하면서부터 의식적으로 그녀의 기억을 지웠던 것일 수 있다. 남편의 전여자 친구로 기억하기 싫었을 테니. 조금 전 그녀가 꿈에 나타나기 전까지, 그녀는 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어떤 연유로 갑자기 꿈을 통해 나를 고소한 것인지 찜찜하다. 케케묵은 대학시절의 연애? 그러한 일로 이제 와서 고소했다는 가정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엄밀하게 따져보자면, 내가 남편과 그녀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그녀와 헤어진 이후에, 그것도 시간이 많이 흐른 후부터 우리가 사귀기 시작했으니 그녀와 남편이 헤어진 배경에 내 탓이 있을 리 없다. 그럴 것이다. 내 기억이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정말 그 둘이 먼저 끝난 이후에 남편과 내가 사귄 게 맞다. 그런데 이 찜찜한 기분은 뭐지? 그녀가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 할 것 같다. 그녀와 소식을 주고받을만한 후배를 만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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