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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코넛 Sep 26. 2024

unflattening 생각의 형태

어수선한 가운데 집을 나왔기에 실수를 뒤늦게 알았다.


하루를 시작하고 외출 준비를 하는 시간이 

다른 날보다 어수선한 아침이었다. 

생각이 분산되거나 딴생각에 빠져있으면 

생각의 형태는 단조로움에 머물러서 일하는 속도도 느리고, 

무엇인가 하나를 꼭 빼먹게 된다. 

마치 글을 쓸 때 오타가 발생하는 일과 비슷하다. 

그래서였다. 

나는 왜, 무엇을 위해, 

생각의 나사 하나를 풀어놓은 사람처럼 

생각의 속도를 느리게 만들고 

가끔은 생각 밖으로 빠져나오려고 시도하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책꽂이에서 하버드대학교가 처음 출간한 만화책을 꺼내어 펼쳤다. 

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닉 수제니스의 <언 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unflattening>를 들어봤거나 

책을 소유했거나 읽었을 수 있다. 

그 책이 출간되자마자 샀다. 

일러스트가 좋아서이기도 했고, 

생각의 형태를 이루는 구조를 다루었다는 점이 흥미로웠었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멈추고 그냥 꽂아놓았었다. 

머리 회전이 다른 사람들보다 느린 나로서는 그 책이 만화라서 만만하게 접근했었는데, 

오히려 알고 있던 철학과 충돌한 한 장면에서 

고민이 깊어져서 더 나아가질 못한 채 멈추었었다. 

한 번 깊이 매몰되면 

그 안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 

오늘, 그 책의 첫 주재인 <단조로움>을 한 번 옮겨본다. 




천근의 무게를 짊어진 듯, 

숨 막힐 듯 경직된 채, 단조로움 < flatness >으로 가득 찬 풍경 

<문자 그대로의 단조로움이 아니다

단조로움은 하이퍼 리얼한 외관 < facade > 안에 

진정한 제 모습을 숨기고 있다. 

이는 사이의 단조로움이다. 

그들은 현 상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할 

비판적 차원이 결여된 채 모두 제자리를 지킨다. 

이곳에서는 다양해 보이는 선택지조차 미리 정해진다.

<가능성의 신비>는 잊힌 채 

제자리에서 같은 목소리를 낼 뿐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감옥 같은 틀이 너무 많아서 이들은 그 틀을 보지도 못하고 

그 틀을 존속시키는 데 자신이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걸음마를 떼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시스템의 기준대로 분류되고, 

이미 방향이 정해진 트랙 위에 놓여 

지정된 경로를 따라 앞으로 이동해 지시를 받는다. 

정교하게 구성된 수많은 과정을 통과하며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보를 주입받는다. 


이 모든 과정은 적절한 결과를 내기 위해 철저하게 기획된 것이다. 



모든 일은 상자에서 일어난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공간뿐 아니라 시간과 경험도 상자 안에 넣어진다. 

이것들은 각각 개별 단위로 분류되어 깨끗하게 포장되고, 

효율적인 의사전달을 위해 말하는 자는 듣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새겨진 수많은 틀은 내재화된다. 

외부에서 주입된 내용이 내면에 그대로 흡수되는 것이다. 

모든 이들은 정기적으로 시스템이 시행하는 검사를 받는다. 

갖가지 다양한 도구를 동원해 인간을 계량화하고 데이터로 전환해 

더 많은 상자를 만들어 낸다. 

스스로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동떨어진 힘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평가받는다. 

모두가 좁디좁은 틈에 끼워 맞춰져 


누구나 대체 가능한 인간으로 규격화된다. 


한때 인간이라는 창조물은 

자신의 신체 비율로 우주를 가늠하려 했고, 

소우주인 자신의 신체를 통해 더 웅장한 천체들을 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은 스스로 제한된 틀을 만들어, 

좁디좁은 비눗방울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따라, 

단일한 차원에 줄 세워진 <생각>과 <행동> 정확하게 

같은 발걸음으로 열을 맞춰 줄지어 걷다가 

똑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한때 넓은 안목으로 춤추듯 줄달음질 치며 

수많은 가능성으로 활기 넘치던 시야의 문은 완전히 닫혀버리고, 

범위는 협소해졌다. 

역동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잠재적 에너지는 감소되고 

그 활기를 완전히 잃었다. 


대신 단조로움만 덩그러니 남았다. 



우리의 생각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서는

이해했고 동조했고 공감도 했었다.

그래서 아마도 가끔 벌어지는 터무니없는 생각의 방출이

때로는 반갑기도 했다.

정형화에서 벗어난 듯해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명석해 보이고 행동도 과감하고, 

갈등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나는 그 모든 게 평균치를 밑도는 느낌도,

어떤 날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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