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만으로 충분한 날과 육감이 필요한 날은 다르겠지?
집을 나섰을 때만 해도 맑고,
화창한 날씨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맑았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엔 장대비가 내렸다.
바람까지 동반해 아주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움직여도 시야 확보가 어려워
잠시 근처의 카페로 피신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이 이토록 적절한 날을
익숙하지 않은 도로에서 만난 줄이야.
“ 나는 마치 일기를 쓰듯 살아있는 우주를 기록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계절, 하루, 시간,
풀잎 소리, 파도 소리, 일몰, 하루의 끝, 그리고 고요함까지.”
– 우고 론디노네
산 뮤지엄에서는
스위스 현대미술가 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 <BURN TO SHINE>.
미술관의 세 전시실은 물론,
백남준관, 야외 스톤 가든을 아우르며 조각, 회화,
설치를 비롯한 영상까지 포함한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국제갤러리에서 했었던 그의 개인전시와
비교가 안될 만큼 규모가 컸다.
작가는 전시 제목인
<BURN TO SHINE>을
(transformation)에 대한 욕망이라 설명한다.
“제목은 존 지오르노의 시
〈You Got to Burn to Shine (빛나기 위해 타오르라)〉에서
처음 영감을 받았으나
이는 삶과 죽음의 공존에 대한 불교 격언이기도 하며
더 오랜 역사를 가진 그리스 신화의 불사조를 연상시킨다.
순환적으로 부활하고 매번 새롭게 재탄생하는
이 불멸의 새는
태양과 연계되며, 전생의 <재>로부터 다시 태어나
새 생명을 얻는다.”
위의 설명은 미술관이 설명해 놓은 글을 참조해서 옮겼는데,
내 감상은 글과는 다르다.
설명과 감상이 상이할 때는
마치 미로 속에서 우왕좌왕하는 기분이다.
그의 조각들은 고인돌을 연상하게 했고,
그가 사용하는 색과 색의 만남은 내가 좋아하는 조합이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은 불친절하다는 인상이 강하다.
보이는 것이 다 인듯한?
이런 감상은 오로지 내 몫일뿐,
대중이 좋아하는 작가다.
산뮤지움은 개관했던 해부터 매 해 한 번씩은 갔었다.
풍광도 좋고, 건축물도 아름답고, 정원도 갈 때마다 풍성해져서
인상이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사람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갈 때마다 가격이 인상되는?
<개관했던 첫해의 통합권 가격은 현재의 기본권가격이었었다.>
그리고 갈수록 관람객이 많아져서
호젓함은 바라기 어려운 상항이다.
작품과 미술관 그리고 관람객 사이의 자극이 다양해서
마음이 갈대처럼 휘청거렸고,
덕분에 이미지 소재를 갈대밭으로 정하고 놀았다.
“뉴랜드 아처는 지적이고 예술적인 문제에서는
옛 뉴욕 상류사회의 선택받은 이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그중 어느 누구보다도 독서를 많이 했고,
생각도 더 많이 했고,
견문도 훨씬 더 넓었다.
그들은 따로따로 있을 때는 열등함을 드러냈지만,
뭉쳐 있을 때는 뉴욕을 대표했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 발췌
< 오늘 너는 너의 색을 감추었었다.
무채색의 향연처럼
흰색에서 검은색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색이 너의 표정에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멍청하게 우산 챙기는 것을 잊어버렸다.
아니 다른데 정신이 쏠려서
미처 너의 기분을 살피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너는 네가 품었던 것들을,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내는구나.
단시간에 쏟아내고 가벼워지려고 하는구나.
인간만 이기적인 유전자를 갖은것이 아니었음이 반갑다 >
위의 문장은 카페에서 잠시 쉴 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구가 <레이디스룸>에 간 동안에
핸드폰에 입력했었던 하늘의 표정이다.
이렇게 기분을 옮기고 있을 때 친구가 와서 멈추었다.
한 번 끊긴 생각은
그다음에 어떤 문장을 쓰려고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게 완전 단절이다.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혼자 있는 기분은
아마도 위의 이미지처럼,
땅으로 머리를 박고 오감 외의 것으로
그 공간을 인지하는 기분과 닮았을 것 같다.
다만, 생소함이 주는 신선한 생각과 마주하므로
답답하고 버거워도 견딜 뿐 아닌가?
사소한 변화를 읽어내려고 노력하고
대상을 시각화하려고 노력하는 면에서 보면,
우고 론디노네와 이디스 워튼과 나는 닮았다.
해석하는 방식이나 표현하는 재료나 매체의 차이는 엄청나지만 하면서
나를 그들과 동급으로 올려놓는
그런 무례는 범하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그들을 느끼고 난 후엔 잠재되어 있던
창의력이라 이름 붙이고 싶은 욕구가
샘물처럼 마구 솟는다.
“그들 세계의 사람들은 희미한 암시와 미묘한 뉘앙스 속에 살고 있었고,
그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를 이해했다는 사실은
어떤 설명으로 통하는 것보다 더 그들을 가까운 사이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에서 발췌
발가락이 다섯이 아닌 여섯이다~~~
발가락을 하나가 더 추가한 이유는
육감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다.
오감으로 살짝 부족한 부분을 덧댄 육감처럼,
순기능이 늘어나는 것이다.
학기 중과 방학의 차이는 마음의 여유 한 가지뿐이다.
24시간이라는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장소와
비슷한 일만 줄지어 늘어선 것같이 보이는 일상이라
자칫 단조로움에 풍덩 빠져들어
앞뒤좌우 없이 늘어질 수 있는 시간인데,
이 시간이 새로움으로 차오르게 하는 요소,
매혹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 동력의 이름은 아마도
시시때때로 흘러가는 생각과 감성의 효력이겠지?라고 생각한다.
이 밤에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마음의 색이 무채색이 아니라
무지개색보다도 더 다양한 색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다 밝은 색을 선호하지 않겠지만,
나는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단호한 색을 좋아한다.
옷장을 열면 밝은 색 옷이 많은 편이다.
색에 대한 감각은
육감에 의해 발달하는 감각일듯하다.
색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면.....
와우,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