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넥션이 중요한 시대에 고립을 유도하는 성격의 장단점
시월은 열두 달 중에서 가장 시적인 계절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은 때론 엉키는 성질을 가졌으므로
정확도가 떨어지지만,
시월엔,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고
코스모스가 피고 낙엽이 뒹구는 계절이라는
인식이 선명하다.
그런 기억과 함께,
메뚜기도 기억에만 남아있는 곤충이라
언뜻언뜻 메뚜기를 다시 볼 날이 있을까?
하면서 어렸을 때 메뚜기를 잡던 기억을 소환하고
나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를 띤다.
위층에 사는 이웃이 서류 뭉치를 들고 방문했다.
그녀가 상의하고 싶어 하는 내용은
나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는 내용이었다.
읽어 본 후 조언해 주겠다고 말한 후 10장이 넘는 서류를 꼼꼼하게 읽었다.
사실 나는 삶에 필요한 부분? 중에서
투자나 경제와 같은 영역이 약한 편이지만
자료를 검토할 때엔 객관의 시선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할 수 있었기에
그 서류에서 말하는 문제들에 형광펜으로 체크해 두고
위층에 올라가서 분석 내용을 설명해 드렸다.
그런 과정에서 위층의 이웃은 고구마를 삶고 커피를 내려서 주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웃인 목사님 사모님까지 합류해서 대화가 길어졌다.
세수도 안 하고 잠옷 바람으로 있다가 방문객을 맞이했고,
내 일정에 변동이 생길 것이라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바로 위층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이래저래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이웃으로 인해 하루의 시작이 뒤로 밀려서
오늘 해야 할 것을 모두 이행하지 못한 날이다.
그렇지만 이웃과 왕래가 없이 살았었기에
이참에 이웃과 한 발 가까워졌다는 만족을 느꼈다.
사교적이지 못해서,
수더분하게 주변인들과 지내는 성격이 아니라서,
이웃의 얼굴도 모르고 사는 삶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므로
어쩌면 난 삶에서 실질적으로 중요한 정보들을
많이 놓치고 살았을 수 있다.
이웃과 소통을 잘하고 사는 사람이
여러 측면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살아가기 쉽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어렸을 때부터의 성격을 바꾸긴 쉽지 않다.
독불장군 캐릭터도 아니면서 외톨이?
자처한 외톨이로 살아가는 삶이
익숙하고 편해져서 바꾸기 더 힘들 수 있다.
덕분에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내 작업을 할 시간이 주어졌다는 장점이
점점 더 고독한 일상에 머물게 하는지도 모른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라이너 쿤체의 시 중에서
제일 좋아하게 된 시는 교수님의 집?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에 소재한 <여백 서원>을 방문했을 때
여백 서원의 안뜰 깊숙한 곳의 정자 앞 돌에 새겨진 짧고 간결한 시였다.
”한 잔 재스민 차에의 초대
들어오셔요, 벗어놓으셔요 당신의
슬픔을. 여기서는
침묵하셔도 좋습니다 “
읽는 것과 동시에 마음에 평화가 깃들었던,
이 시에서 정말 글의 힘이 이렇구나! 하고 감탄했었다.
그때부터 라이너 쿤체의 시를 더 좋아했다.
여백 서원에 가기 전까지는 쿤체의 시 <민감한 길>만 기억했던 듯하다.
오늘은 그의 시 중 또 다른 울림을 주는 시 한 편을 읽는다.
예술의 끝
넌 그럼 안 돼,라고 부엉이가 뇌조한테 말했다.
넌 태양을 노래하면 안 돼
태양은 중요하지 않아
뇌조는
태양을 자신의 시에서 빼어버렸다.
넌 이제야 예술가로구나
라고 부엉이는 뇌조에게 말했다.
그러자 아름답게 캄캄해졌다
- 라이너 쿤체
< 아름답게 캄캄해졌다 >는 문장이
황현산의 < 밤이 선생이다 >와 함께 이 밤을
밤의 어둠이 품은 것들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