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는 행위를 말할 때 사용하는 이야기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자 중
가장 과학적인 문자는 한글이다.>
타이포그래퍼 안상수 교수님이 RCA에서 강연하셨을 때
하셨던 말을 한글날이라 새삼 다시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를
읽고 쓰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어제부로 내가 시작했던 백일 프로젝트는 완결했다.
그 프로젝트 덕분에 매일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다.
다행스러운 결과다.
프로젝트는 끝났으니 이제부터의 글은
유동적인 생각 채집을 표현하는 시간이 될 듯하다.
매일 포스팅해야 한다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글을 쓰면
자유, 습관, 의식을 조율할 수 있어서
조금 더 나은 포스팅이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운전 중, 라디오에서 <뻐꾸기>의 울음을 들려준 후
뻐꾸기가 여름을 알리는 새,
한국에서 번식해서 겨울을 나기 위해 아프리카로 날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온다는 설명을 했다.
순간 뻐꾸기가 나보다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지도도 없이 그 먼 곳까지 날아갔다가 온다는 일이 쉬울까?
뻐꾸기는 하루에 23,000km를 날아간다고 했다.
어디를 갈 때 지도에 의존하는 습관과
전화번호를 저장해서 외우는 일이 없어진 이후로
나는 점점 더 길치가 되고 내 전화번호 외에
그 어떤 전화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나와 뻐꾸기가 비교되었다.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종종 사용했었던
놀려주는 말 중에 친구에게 지능지수가 낮다는 표현으로
<새 머리>라고 표현했었는데
잘못된 표현이 아닐까? 라디오를 들으면서
자동반사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아테네 교외의 언덕에 살며 강도를 일삼는 악당이었다.
그는 강도질을 하며 납치한 사람들을 자신이 만든 철제 침대에 누이고
포로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그만큼 잘라내고
포로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억지로 늘려서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 침대의 크기가 고정된 게 아니라
프로크루스테스만 알고 있는 장치를 통해 늘렸다 줄였다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침대에 키가 들어맞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다.
결국 프로크루스테스의 기행은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의 귀에 들어가고
테세우스는 프로크루스테스를 잡아서 침대에 누이고는
똑같은 방법으로 머리와 다리를 잘라서 해치웠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자신과 다른 생각과 말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여
자신에게 맞추려 하는 모든 행위를 꼬집을 때 쓰기도 한다. “
-최영균 시몬 소장님의 글, 뿌리내림 117호, 2024 가을호에서 발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갖지 않고 삶을 살아가긴 힘들 듯하다.
다만 제각각의 기준이 사람이 아닌 일이나
자신이 추구하는 삶으로 가는 길에서만 사용한다면
관계에서의 폭력적인 부분은 작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의 능력에서 일과 관계를
무 자르듯이 잘라내어 행동하기는 너무 어렵지 않을까?
다만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를
누군가는 타인의 행동이나 말의 옳고 그름으로 평가하는
순간 주춤, 혹은 멈칫, 과 같은 시간을 끼어서
본인의 행동에 제동을 걸을 줄 아는 사람과
브레이크 없이 모든 사람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평가하는 사람으로 나뉠 것이다.
또한 다름을 인정하는 폭이 넓은 사람이 갖은 침대와
좁은 사람이 갖은 침대의 차이도 클 듯한데,
침대의 크기는 앎의 차이로 정해질까?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삶의 여정에 길잡이처럼
다양한 경로로 형성된 기준인 <침대>,
삶의 지향하는 삶에 이르기 위해서
누구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필요할 것이다.
기준이 없으면 나아갈 방향으로 가는 행동을 할 수 없으므로.
살아가는 기준인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나에게도 있다.
내가 가진 침대의 크기는 잘 모르겠지만,
점검해 보니 극을 싫어하는 내 성격상 나는
양극의 사이,
즉 브레이크를 가끔은 사용하는
극과 극의 중간 지점에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