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메카드와 변신로봇
본질은 추구하지만 유연한 사고를 주장힌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완구류들은 거의 다 변신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과연 아이들이 좋아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변신의 사고를 강요하는 사회상일까?
내가 이야기 하는 오프디맨드 또한 그저 변화를 위한 혹은 반대를 위한 반대편 고수일까? 내가 '야'에 있기에 '여'에 있기에 자리를 잡았기에 그 자리와 위치좌표를 주장하게 되는가?
온디맨드에 반하는 오프디맨드라는 사상 때문에 무조건 악을 쓰며 꼬투리를 잡아서 온디맨드라는 주류에 변화를 가져오려는 것일까?
환경 변화에 잘 대응하는 것을 유연하다고들 한다.
특별히 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에게는 봄의 사고, 여름의 사고, 가을, 겨울의 사고가 있다. 최근에야 경계선의 모호함이 사고와 행동의 정의를 희미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변화에 익숙하여 변신이라는 대안을 가지게 되거나자연스럽게 빠른 포기 혹은 스스로 변심을 유도하는 프레임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고의 변화가 모든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닭과 달걀의 문제로 보고 싶지는 않지만 분명 마음이 변하여 선택하게 만든다. 혹하게 한다. 유발시킨다의 관점이 하나이다.
또 하나는 다른 용도로의 전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장난감과 같이 전체 사상이 바뀌는 파격적인 서비스의 접목은 아직까지는 아닐 것이다. 자동차가 새가 되고 로보트가 된다. 물론 스마트폰의 앱들은 이제 우리의 고정관념을 넘어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특정 장난감을 자동차로 부를지 새 혹은 로보트로 부를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서비스, 브랜드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더욱이 그것이 덕지 덕지 붙은 기능의 조합이면 정채성은 더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텔레비젼 채널과 같이 심플한 기능의 전환이라면 뢱기적일 것이다. 변신할 때 마다의 정체성으로 정의 되기 때문이다.
마음이 변하기 때문에 변신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제공하는 서비스를 변하게 하여 마음을 변하게 한다.
나는 후자에 힘을 싣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