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흔들리는 세상 속, 끝내 무너지지 않는 단 하나

신륵사 향나무 아래서 배운 가벼운 삶과 죽음

by 명리하는 영화


나는 여주의 유명한 관광지, 신륵사를 자주 찾는다.



1. 600년을 버틴 나무 앞에서


신륵사 조사당 앞, 600년을 살았다는 향나무 앞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이 나무는 반듯하지 않다. 몸통은 거칠게 비틀렸고, 가지는 제멋대로 휘어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공적인 생’의 매끄러운 형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늙은 나무 앞에 서면 내 안의 소란스러운 질문들이 잦아든다.


여름의 폭염에도 타지 않았고,

겨울의 혹한에도 쉽게 잎을 떨구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경이로운 것은,

이 나무가 자기 삶을 변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휘어졌으면 휘어진 대로, 비틀렸으면 비틀린 대로, 그저 거기 서 있을 뿐이다.



2. 말이 너무 많은 세계에서

나는 오랫동안 말이 너무 많은 세계에서 살았다.

말 잘하는 스승, 끊없는 완벽한 논리 , 각자의 수 많은 해석들. 지난 30년 동안 수만 마디의 말이 나를 설득했고, 다그쳤고, 길들였다.


그러나 신륵사 마당의 석종과 향나무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그 어떤 화려한 문장보다 무거웠다.

나무와 돌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굳게 서 있을 뿐이다.


‘흔들리지 마라.’

‘굳이 너를 증명하려 애쓰지 마라.’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그런 문장을 듣는다.


진리는 말의 양이 아니라,

견뎌낸 존재의 무게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이 나무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하다.



3. 뿌리를 어디에 둘 것인가


나는 한때 계절을 몹시 타는 사람이었다.

상황이 좋으면 신념이 자라고, 비판이 오면 뿌리째 흔들렸다.

타인의 시선과 텍스트의 문장 위에 뿌리를 얹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람이 불면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신륵사의 향나무는 날씨와 협상하지 않는다.

척박한 땅을 탓하지도 않는다.

다만 깊이, 더 깊이 뿌리를 내릴 뿐이다.


나는 그 앞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4. 나옹 선사와 좌탈입망



이 비틀렸으나 끝내 무너지지 않은 기둥을 바라보며,

나는 600년 전 이곳의 주인이었던 나옹 선사를 떠올린다.


그는 남한강 가 벼랑 끝, 강월헌 앞 너럭바위에서 좌탈입망의 모습으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억지로 숨을 붙들지 않고, 가을날 잎이 떨어지듯 고요히 육체의 옷을 벗었다.


신륵사에 올 때마다 나는 강월헌 앞에 서서 잠시 고개를 숙인다.


앉은 채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그 자리를 더듬으며 생각한다.

죽음은 두려움의 사건이 아니라, 잘 정리된 삶의 마지막 자세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5. 가볍게 떠나는 연습 - 나의 좌탈입망 선언


나는 오래전부터 누워서 죽지 않겠다고 말해왔다.


병상에 무기력하게 누워 타인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시간을 연장하는 대신,

저 향나무처럼 단단하게 앉아 육체의 옷을 조용히 벗어내고 싶다.


억지로 붙잡지 않고,

억울해하지 않고,

잘 살았다는 얼굴로.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는 오직 하나.


그것은 거대한 신념도,

화려한 성취도 아니다.

내 영혼의 존엄이다.


나는 더 이상 공포에 매달려 생을 연장하지 않겠다.


타인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의료의 시간표에 내 마지막을 맡기지 않겠다.


숨이 다하는 날,

나는 내 힘으로 등을 곧게 세우고 앉겠다.


누군가의 위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허락이 아니라,

내 삶을 내가 정리한 사람의 얼굴로.


강월헌 앞의 돌처럼,

600년 향나무처럼,

나는 가볍게 떠나겠다.


좌탈입망(坐脫立亡)
이것이 지금, 살아 있는 내가 나에게 하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