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채워져 갈 마음의 공간
공간 투쟁이 시작됐다.
열세 평. 베를린에서 우리 세 식구에게 허락된 공간의 크기이다. 이제껏 대궐같은 집에 살아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열세 평은 좀 아닌 것 같다. 내가 상상한 독일 유학의 판타지가 처음부터 무너졌다. 유학원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가족을 동반한 학생을 위한 기숙사라는데... 한국에서 가져온 짐만 정리했는데도 여유 공간이 없었다. 구조는 또 왜 이런가. 전체적인 구조가 마름모꼴이어서 가구 배치에 적지 않게 애를 먹었다. 가구 배치를 어떻게 하든 반드시 죽는 공간이 발생했다. “아주 미칠 노릇이다.” 냉장고의 크기는 고작 내 무릎을 살짝 넘는 높이의 아주 아담한(?) 사이즈만 허락됐다. 음식 저장공간으로서의 활용은 물 건너 갔다. 모든 공간(空間)이 너무 비좁았다. 딸의 물건들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내 공간은 상대적으로 더 좁아졌다. 집 밖으로 나가도 상황은 비슷했다. 양쪽으로 방들이 줄지어 들어선 복도식 구조의 기숙사에서 방음은 사치였다. 열정이 과한 스페인 이웃 덕분(?)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늘어갔다. 하루가 멀다하고 파티를 여는 그들, 옆집에서 들려오는 투머치 노이즈(too much noise)에 직접 문을 두들겨 항의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깊은밤, 정적을 깨며 들려오는 그들의 민망한(?) 소리는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자고있는 딸이 깨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낮과 밤으로 넉넉하지 못한 공간 때문에 숨이 막혔다. 좀 과장되지만, 뒤주 안에 갇힌 사도세자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공간의 결핍은 나의 정신세계에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흉부에 불편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죽음이 두려워졌다. 설마, 공황장애? 내 안에서는 이미 공간 투쟁이 시작됐다.
책상 위에 그어진 38선
그러고 보니 공간 확보를 위한 투쟁은 꽤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치열한 전쟁이 일어났다. 새롭게 만난 여자 짝꿍과 맨 처음 한 일은 책상을 반으로 나누고, 줄을 긋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38선'이라고 불렀다.(지금 생각해보니 너무나 당연하게 '38선'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당시 '38선'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였던 걸까. 남과 북 사이에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도, 심지어 초등학생들의 책상 위에도, 그렇게 많은 '38선'이 존재했던 것 같다. 더 슬픈 것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짝꿍과 나 사이에는 장벽이 세워졌다. 그 장벽은 절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넘어가는 일이 발생할 경우, 상대방을 향한 도발로 간주하고, 그에 상응하는 물리력을 행사했다. 우리는 각자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연속이었다.
땅따먹기와 축구의 공간 투쟁
공간 투쟁은 놀이에서도 나타났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한 '땅따먹기'. 놀이는 간단하다. 모랫바닥 위에 직사각형의 선을 그리고, 4개의 모서리에 부채꼴 모양의 집을 만든다. 각자의 집(Home) 위에 조약돌을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튕긴다. 조약돌이 나간 위치까지 선을 그리는데, 세 번 안에 조약돌을 반드시 집에 넣어야 한다. 그렇게 조약돌이 지나간 자리는 플레이어(Player)의 공간이 된다. 2-4명이 함께 놀 수 있는데 상대방의 공간에 나의 조약돌이 들어가면 패배하게 되고, 정해진 직사각형 안에서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플레이어가 승자가 되는 놀이이다. '땅따먹기'와 비슷한 스포츠가 있다. '축구'다. 축구 역시 직사각형의 그라운드 위에서 22명의 플레이어가 공간 투쟁을 벌인다. 공(Ball) 하나를 두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골대에 공을 차넣는 것이 축구라고 생각한다면 큰일 난다. 감독은 그라운드를 4-4-2 혹은 3-4-3 등 다양한 포메이션으로 나눈다. 이렇게 나눈 이유는 공을 골대에 넣기 위해 필요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축구는 11대 11로 싸우는 경기이지만 어떤 포메이션을 사용하고,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되느냐에 따라 강팀과 약팀이 구분된다. 포메이션 활용을 잘할수록 공간을 많이 확보할 수 있고, 공간을 많이 확보했다면 골을 넣을 수 있는 확률도 올라간다.
골이 터지는 순간, 선수는 물론 관중, 텔레비전 시청자들도 미친 듯이 열광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남의 공간을 침략하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생활공간의 결핍이 전쟁을 불러왔다.
왜 유독 유럽에 축구 강국이 많은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들의 역사에 답이 있다. 유럽의 역사는 더 넓은 공간(영토)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수 세기에 걸쳐 전쟁을 벌였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으며 전쟁의 승패에 따라 왕조가 달라졌다. 그래서 고등학교 서양사 시간에 주야장천(晝夜長川) 전쟁 이야기만 하는 거다. 심지어 독일은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나치(Nazi) 시대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레벤스라움은 독일어 '생활'을 뜻하는 '레벤(Leben)'과 '공간'을 뜻하는 '라움(Raum)'이 합쳐진 조어이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생활공간' 혹은 '생활권'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 적용한 개념인데, "국가도 유기체처럼 여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국가도 진화,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만약, 문화가 발전하지 못한 나라라면 더이상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공간을 문화가 발전한 국가에 양도하는 것이 낫다"고 설명한다. 레벤스라움을 배경으로 독일 나치는 1차 세계대전 패배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레벤스라움은 일본으로 건너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이 이데올로기(Ideologie)를 근거로 자신들의 식민지 확대를 정당화했다.
공간의 결핍, 그로 인한 공간 투쟁이 그래서 무서운 거다. 열세 평이 주는 불편함이 인류 역사의 또 다른 불행을 만들 수도 있다. 협박 아니다. 진짜다. 동네 개들이 전봇대 밑에만 가면 나오지도 않는 오줌을 쥐어짜며 영역을 표시하는 것도 충분한 공간을 누리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사람의 본능이 개보다 무섭다.
예부터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공간은 나누면 싸움 난다". 아주 난리 난다. 공간을 나누었을 때 기쁨이 배가 되는 곳은 오직, 신혼부부의 침대뿐이다.
열세 평 공간에서 그나마 나를 위로해준 것, 내 키보다 큰 창문이다. 이 길게 뻗은 창문이 세계 전쟁(?)을 막았다. 정말이다.
창문은 단절된 공간 사이를 서로 쳐다볼 수 있는 관계로 만들어 준다. 창문은 안에서 밖을 볼 때 아름답다. 밖에서 안을 보면 자칫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