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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환 Jun 19. 2020

붉은 닭죽

닭죽 한술에 담긴 우리 가족 근현대사

얘들아! 닭죽 먹자

방문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와 나는 여행용 가방 2개와 이민 가방 2개의 지퍼를 닫고 자물쇠 구멍에 고리를 걸던 찰나였다.

“배고프다. 먹고 마저 정리하자!” 내 말에 아내가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탁에 앉아, 앞에 놓인 닭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아내.

"왜 그래? 배고프다며?"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이런 닭죽은 처음 봐" 나를 향해 일별하더니 아내는 부엌에서 나오는 엄마를 향해 총총걸음으로 달려갔다. 

"어머니! 이건 무슨 닭죽이에요?" 

"세상에 하나뿐인 사연 많은 닭죽이지"

"......"

나는 아내의 팔을 살며시 끌어당기며 말했다.

"일단 잡숴봐! 사연은 천천히 이야기해 줄게. 맛은 더 기가 막혀"


뜨거운 닭죽을 두 그릇이나 먹었더니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6월의 더운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독일 유학을 결심하고, 3개월 전 회사를 그만두었다. 백일이 이제 막 지난 딸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날 생각을 하니 나도, 아내도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동안 유학을 준비하면서 눌려있던 기운을 바로잡고, 음양의 균형을 맞추기에 닭죽만 한 음식이 또 있을까. 그래서 흐르는 땀을 닦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나쁜 기운이 땀에 섞여 몸 밖으로 빠져나가리라는 믿음으로.

아내 역시 닭죽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젓가락을 내려놓지 못한 채 그릇에 붙어있는 닭고기살을 동그랗게 오므린 입속으로 가져갔다. 아내는 엄마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나에게 시선을 던지면서 코 위에 세 개의 주름을 만들었다. 닭죽에 얽힌 사연이 궁금하다는 사인이었다. 

"엄마, 후식으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수다나 좀 떨까요?" 내가 말했다.

"내일 출국인데 짐 정리 마저 하고 일찍 자야지 커피 마시면 잠 안 와"

내일이면 아들 가족을 독일로 떠나보내야 하는 서운함이 엄마의 말끝에 엿보였다. 눈치 빠른 아내가 말을 이었다.

"잠 올 때까지 어머니랑 놀다가 잠은 비행기에서 자면 되죠"

엄마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날 밤의 수다는 닭죽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연 많은 닭죽. 이름 하야 '붉은 닭죽'.

닭 삶은 육수에 찹쌀로 죽을 쑤고, 고기는 뼈에서 모조리 발라내어 따로 그릇에 담아 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한다. 퍽퍽한 가슴살, 다리의 기름진 살코기, 그리고 날개 부위의 연한 고기가 하나로 뭉쳐지면서 조화롭게 각자의 역할을 다한다. '붉은 닭죽'이라는 이름은 고추장과 고춧가루가 들어가기 때문에 붙여졌다. 고추장을 너무 많이 넣으면 고기 맛이 퍽퍽해지고, 고춧가루를 많이 넣으면 각기 다른 부위의 고기들이 서로 뭉쳐지질 않는다. 참기름과 식초로 향과 맛을 더한다. 얼핏,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참기름과 식초가 조화를 이루면서 묘한 맛을 만들어 낸다. 둘 중 하나라도 과하면 맛을 망쳐버린다. 인생이 그렇듯 음식에 들어가는 양념도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새삼 깨닫는다. 설탕으로 단맛을 더하고, 마지막으로 다진 마늘과 잘게 썬 파를 넣어 한식임을 증명한다. 이제 조각난 고기 위에 입혀진 양념을 조물조물 버무린다. 고기들이 잘 뭉쳐질 때까지. 

닭 육수로 끓여 뽀얀 색을 내는 죽 위에 붉은 고기 고명을 얹고 숟가락으로 쓱쓱 비벼 한술 뜬다.

맛있다!


엄마는 닭죽 만드는 법을 외할머니에게 배웠다고 했다. 황해도가 고향인 외할머니가 만든 조리법이란다. 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하지도 않은 조리법의 출처가 나는 궁금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구글에 '황해도식 닭죽, 고추장 닭죽' 등으로 검색해봤다. 죄다 하얀 닭죽만 나온다. (매운 닭죽을 검색하면 보통 닭죽에 고추장을 비벼 먹는 빨간 닭죽이 나온다. 외할머니의 조리법과는 다르다.) 붉은 닭고기 고명을 얹어 먹는 닭죽은 검색되지 않았다. 

해방 직후, 외할머니가 살던 황해도 집은 살림이 넉넉하지 않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 복날이 오면 닭 한 마리를 여러 사람과 나눠 먹기 위해 종종 닭죽을 끓였고, 평상에 둘러앉아 함께 더위를 식혔다. 닭고기는 얼마 없는데 먹여야 할 사람은 많고, 어쩌면 닭고기 고명이 붉은 양념을 입은 이유도 매콤, 새콤 그리고 달콤한 양념 맛으로 고기의 부족함을 채우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양념이 만들어낸 자극적인 맛의 조화가 좋아서 '붉은 닭죽'을 즐겨 먹는지도 모른다.


하마터면, 붉은 닭죽의 맛을 모르고 살아갈 뻔한 위기도 있었다. 한국 전쟁 중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와 따로 피난 길에 올랐다. 당시 외할머니는 딸이 둘 있었는데 큰딸은 친척 어른집에 잠시 맡기고 작은딸만 데리고 남으로 내려왔다. 작은딸이 나의 엄마다. 울면서 매달리는 아홉 살 큰딸에게 "꼭 찾으러 오겠다"고 약속했던 외할머니는 살아계시는동안 다시는 큰 딸을 만날 수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간간이 소개되는 이산가족의 사연처럼. 전쟁이 끝나고 마포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아가면서 외할머니는 몇 해 동안 더운 복날이 와도 닭죽을 끓이지 않았다. 매콤한 고명을 넙죽넙죽 잘 받아먹던 큰딸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었으리라. 이후로 외할머니는 딸 하나, 아들 넷을 더 출산했다. 길고 지난한 가난 속에서 또다시 먹여야 할 식구가 많아졌다. 이 무렵, '붉은 닭죽'은 다시 밥상에 등장했다. 더욱 강렬해진 양념과 함께. 


엄마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막내 외삼촌이 태어났다. 외할머니는 출산 후 엄마에게 '붉은 닭죽' 조리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막내 외삼촌이 걸음마를 막 뗐을 때, 외할머니에게 풍(風)이 찾아왔다. 이때부터 동생들을 먹이는 것은 엄마의 몫이 됐다. 스물일곱 살에 아빠에게 시집올 때까지. 내가 태어나고 두 살 무렵, 삼복(三伏)중 우리 집에 엄마의 이종사촌 동생이 방문했다. 엄마는 가깝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촌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달갑지 않았다. '막걸리 보안법'이 활개를 치던 시절에 데모로 경찰 수배 중인 사촌을 반갑게 맞이하긴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엄마는 도망치다 오죽 갈 데가 없어서 여기까지 왔을까?"라는 마음에 급하게 식사를 준비했다. 계절에 걸맞게 닭죽이 나왔다. 두 그릇을 뚝딱 비운 사촌이 벌겋게 익은 얼굴의 땀을 닦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누이네 붉은 닭죽이 이리 맛있으니 내가 빨갱이라는 소리를 듣는 거 아니오? 허허"

사촌은 분명 엄마에게 농담을 던진 것인데 엄마는 그가 떠나고 며칠 동안이나 불안감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닭죽도 붉은색을 띠어서는 안 되던 시절의 이야기다. 


밤이 깊도록 닭죽 이야기로 수다를 떨던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벌써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내가 사는 독일은 4번째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고,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은 탄핵당하였다. 백 이십일 무렵 독일에 온 딸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엄마는 칠순을 훌쩍 넘기셨다. 크고, 작은 사건의 소용돌이가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학위를 마쳤다. 서른여섯 살에 시작한 유학은 정말 쉽지 않았다. 퇴직금, 보증금, 정기예금 등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시작했지만, 생활비는 늘 부족했다. 무더운 어느 여름날 엄마에게서 '붉은 닭죽' 조리법을 전화로 전수받았다. 맛의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찹쌀로 죽을 쑤고, 양념 된 붉은 닭고기 고명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몇 번의 끼니를 '붉은 닭죽'으로 해결했다. 70여 년 전, 길고 지난한 가난 속에서 외할머니가 닭 한 마리로 여러 사람을 배부르게 한 것처럼. 이제 나도 이 사연 많은 '붉은 닭죽'에 나의 이야기를 얹었다. "힘들고, 기운이 쇠할 때면 뜨거운 붉은 닭죽 한 그릇을 호호 불어가며 뚝딱 해치운다.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고 있다 보면 정신도 안온해지는 느낌이다" 


논문 지도과정에서 나는 교수에게 부모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두 분 다 이북에 고향이 있고, 한국 전쟁 이후 남한에서의 삶은 힘든 것투성이였다"고, "그럴 때마다 이상하게 고향의 음식을 먹으면 또 살아갈 힘이 생겼다"고 말했다. 

교수는 조용히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의 이야기를 더했다. 

"우리 가족도 이산가족이었어. 나의 작은외삼촌은 1985년에 체코 국경을 넘어서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했어. 그런데 큰외삼촌이 동독 비밀경찰에 그 사실을 밀고했고 작은외삼촌은 국경을 넘기 전에 체포되었어. 그리고는 슈타지 감옥(동독 정치범 수감소)에 수감되었지. 그 무렵 우리 엄마는 서독에 살고 있었는데 작은동생이 감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많이 슬퍼하셨어"

나는 경건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에선가 '프라이카우프제도'(동독의 정치범을 돈을 주고 빼 오는 서독의 제도)를 듣고 오셨고, 몇 달 후 작은외삼촌을 우리집으로 데려오셨어"

"다행이네요" 교수의 말에 어떻게든 반응하고 싶었다.

"1989년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졌어. 모두가 좋아하고 있을 때, 작은외삼촌은 굉장히 힘들어하셨어. 자신을 감옥에 가두고 힘들게 했던 자들과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는 게 괴로웠나 봐"

"통일이 모두를 기쁘게 한 것은 아니었군요" 나는 처음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의 사건이 작은 외삼촌을 회복시켰어"

"뭔데요?" 나는 정말 궁금했다.

"Schkoladenkuchen!(초코케이크)"

"네?"

"동독 집 근처에 있던 빵집에 좋아하던 초코케이크를 다시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괴로움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어. 웃기지? 음식은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아"

나는 붉은 닭죽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시작한다 해도 어설픈 나의 독일어 실력이 긴 서사에 담긴 행간의 의미까지 충분하게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지난해 여름 엄마가 베를린 집에 다녀가셨다. 마침 복날이어서 오랜만에 엄마랑 붉은 닭죽을 끓여 먹었다. 조리는 내가 했다. 이제 내가 엄마보다 맛을 잘 낸다. 엄마도 어느 정도 인정하시는 듯하다. 물론 내 생각이다. 

요새는 가끔 붉은 닭죽을 끓여 지인들을 초대한다. 그때마다 지인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이런 닭죽은 처음 봐요. 다음에 또 생각날 것 같아요"

그러면 나는 살짝 미소만 짓는다. 그리고는 속으로 말한다.

"그럼요. 얼마나 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닭죽인데요"

 또 생각나면 언제든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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