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베를린 예찬론자의 고백
베를린이 과소평가되는 것에 대해 불만이다. 파리, 런던, 프라하, 로마 등 유럽 하면 떠오르는 도시들에 비해 항상 저평가되니 말이다. 물론 그네들보다 화려하지도 않고 오랜 역사를 지니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내가 베를린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스스로 사유(cogitation)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신을 찾아온 이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는 도시이다.
유럽의 한 저널리스트는 베를린을 일컬어 ‘유럽의 뉴욕’이라고 했다. 그만큼 다양한 인종, 문화, 예술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역사의 시간은 이방인들을 베를린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조국(Homeland)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다.
가장 먼저 베를린에 정착한 이들은 유대인이었다. 부모 혹은 조부모의 종교에 따라(1935년 뉘른베르크 법과 부속 법령에 명시된 나치의 인종주의 기준) 유대인으로 분류되었지만 대부분 독일에서 나고 자란 독일 시민권자들이었다. 나치 정권은 ‘인종청소’라는 명목 하에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격리시켰고, "Arbeit macht frei,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유대인들을 선동하고 유린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학살은 베를린 근교에서도 자행됐다.
나치 정권이 물러가고, 베를린은 상반된 이데올로기 배경 위에,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었다. 높이 3.6미터, 길이 106km의 장벽이 공간의 소통을 완전히 가로막아버렸다.
그 사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를린 재건을 위해 다시 이방인들을 불러들였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노동과 희생의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된 그들에게 베를린은 기회의 공간이었다. “돈 많이 벌어서 가족들에게 돌아가리라.”던 공언이 무색하게 낯선 공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익숙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베를린을 다니다 보면 종종 “내가 어느 시간에 와 있는 거지?”라는 착각이 든다. 그럴 때면 주변 공간을 둘러보고 내가 머물고 있는 시간을 생각해 본다.
포탄으로 부서진 것은 부서진 그대로,
잔혹한 학살로 잊혀진 이들을 위해 넉넉한 공간에 기념물도 만들어 주고,
묘비 하나 없이 사라진 이들에겐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 위에 조그만 동판을 새겨줄 줄 아는 도시.
과거, 장벽으로 갈라졌던 공간의 공백은 여러 나라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그들의 창작물로 다시 채웠다.
우리는 가끔 ’ 공간’이라는 용기(container) 안에 ‘시간’을 담는다. 마치 헤어진 연인과 자주 찾던 공간에 다시 가서, 옛 연인과 함께 했던 시간을 되새기는 것처럼 말이다.
유독 베를린만이 다양한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다. 그 흔적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 본다. 베를린의 회색빛 하늘은 생각의 깊이를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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