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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세상은 내편 Dec 07. 2019

그림 같은 아뜰리에

순간의 즐거운 그림 생활




덥고 끈적이던 8월 어느 날이었다.

퇴근하고 지쳐서 발바닥으로 온몸의 무게를 느끼며 버스 계단을 밟고 내렸는데

청량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잠시 산책하려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날따라 평소에 다니지 않던 길을 골라 걸었다.

단독주택지, 아파트, 공원과 생태하천이 아기자기 어우러져 있는 테라스 단지 상가 앞을 지나가는데, 보라색 출입문이 예쁜 아담한 공간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간판에는 ‘아뜰리에 OOOO’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 그리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동네에 아뜰리에가 생기다니 신의 개시인가 싶었다.

창 안으로 보이는 그곳은 조명 때문에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였고 한참 수업 중이었다.

궁금한 건 많은데 갑작스럽기도 하고 쭈볏쭈볏할 것 같아 그 날은 그냥 집에 돌아왔다.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두근두근 한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에 당황스러웠다.


며칠 후 퇴근하는 길에 용기를 내어 문을 밀치고 들어갔다.


아뜰리에는 오픈한 지 일주일 됐고 이제 막 홍보하려던 참이라 했다.

"우연히 누구 만나러 카페 왔다가 동네가 너무 예뻐서 둘러봤는데, 마침 상가에 공실이 있어서 작업실 겸 해서 얻게 됐어요."

서울이 댁인 선생님이 이 동네를 알게 되고 아뜰리에 연 것이 신기했다.


뒤에는 산, 앞에는 그림 같은 주택단지가 있는 예쁜 테라스 아파트 상가의 아담한 '아뜰리에'는 찰떡같이 어울렸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관심은 만화나 일러스트에 있는데 일단 여러 가지 다 해보고 싶고요.

도구도 다양하게 다뤄보고 싶어요.”

“왜 그리고 싶은 거예요?”

“어릴 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타샤 튜더처럼 끝까지 즐기면서 그림을 취미로 삼고 싶어요.”

(이때 아무래도 내 말이 너무 거창했다.)


“그림은 배워 본 적 있나요?”

“초등학생 때 동네 미술학원에서 몇 달요.

그런데 중학교 때는 순정 만화 좋아해서 따라 그리는 것 좋아했어요. 스토리까지 넣어서.”


“그래요? 제가 서양화 전공인데 만화도 프랑스에서 전공했거든요.

엄청 잘 그리시는 거 아니에요?”


(당황)

“아니요 아니요. 그냥 좋아서 끄적이는 수준이었고 중학교 이후로 손 놔서 하나도 못 그려요.”

“혹시 어릴 때 그린 거 갖고 있어요?”

“아뇨~(땀 삐질;;;)

너무 어릴 때라 엄마가 다 버리셨어요. 못 그려요. 진짜.”


당황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선생님 질문에 너무 열심히 답한 나머지 TMI(too much information)였다.


상담이 끝나고 바로 등록했다.



집에 와서 스케치북을 꺼냈다.

생각 난 김에 스케치 한 번 해볼까?


얼마만인가.

연필을 잡고 사람을 그리는데 잘 그리고 싶은 마음과 다르게 초등학생보다 못한 그림이 있었다.

실망감에 벌써부터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난 나에게 어느 수준을 기대한 걸까?

웃음이 피식 났다.

한편으론 지금이라도 시작하게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1번 퇴근 후 그림 같은 아뜰리에에서 나의 그림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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