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순간 세상은 내편 Dec 07. 2019

첫 그림, 하얀 도화지 앞에 앉아서

순간의 즐거운 그림 생활

유아기 때 그림 그리는 게 재밌어서 온 벽을 낙서를 해댔고

엄마는 남은 벽지라도 살리고자 도매로 스케치북을 사다 나르셨다.

잘 그린다고 칭찬은 안 하셨던 것 같은데 맘껏 그릴 수 있도록 해주셨다.

당시 특별히 재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그리고 싶은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게 좋았던 것 같다.


사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던 초등학생 시절 엄마에게 처음으로 학원 보내 달라고 졸랐던 적이 있는데, 미술학원이었다.

미닫이로 된 학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숲에나 있을 법한 아름드리나무가 천장에 닿을 듯 서 있었다.

선생님이 직접 만든 조형물이었는데, 미술 학원을 열면서 아이들과 함께 할 공간을 어떻게 예쁘게 꾸밀까 고심하고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들었을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미술학원에 뛰어간다.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가운데 앉아 예쁜 미소를 가진 다정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그리는 시간을 즐겼다.

오래 다니지는 못했지만 그 몇 달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몇십 년 뒤 그림을 위한 공간에서 4절 스케치북을 올려놓은 이젤 앞에 앉았다.

드디어 기다리던 첫 번째 그림을 시작하는 것이다.

회사를 마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아뜰리에로 걸어왔다.

비슷한 연령으로 짐작되는 친근한 선생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선생님은 손도 풀 겸 어느 정도 그리는지 볼 겸 익숙한 도구인 색연필화로 시작해 보자고 하셨다.

하얀 종이 앞에 앉으니 4절지는 엄청 커 보였고 새삼 긴장됐다.

모작할 서양배 그림을 보며 나름 균형을 맞추기 위해 가로 세로 선을 그어 본다.
연필로 연하게 밑그림 그리고 색칠하는데 실수라도 할까 진하게 색을 넣는 건 두려웠다.
연필처럼 흔한 도구인데도 색연필의 질감이나 강약 조절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많이 덧칠하면 색 안 먹히니까 진하게 할 때는 연필을 세워서도 그려 보세요"


완성되기 전에 색이 덜 들어갔을 때
선생님은 내가 그린 서양배가 유기농의 느낌이 난다고 하셨는데
뭔가 덜 익고 거친 느낌을 에둘러 표현한 것 같다.
 
시간은 금방 갔다.

그림에 집중했던 시간에 대해 희열을 느꼈다.

회사에서 일할 때는 순순한 즐거움을 느끼기 힘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일 안에서 능동적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 커리어를 만들어 주고 나를 먹여 살려주는 일은 너무 고마웠지만 때로는 부담스럽고 갑갑한 것이었다.

퇴근해서도 그 일과 연관된 공부를 하거나 따로 일을 만들 의지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 보면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 싶다.

하지만 목적이 뭐였든 경험은 결국 나중에 내가 무얼 하든 연결되고 융합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직장인, 어린아이가 있는 엄마, 아내 역할에도 시간은 빡빡한데 시간과 돈을 들여 그림이라는 조금은 사치스러운 취미를 가지려니 처음엔 머뭇거렸다.

두근거림을 안고 그림을 시작하면서 글과 그림을 항상 곁에 두는 삶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후에 연결점이 되어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내 곁에 있길 기대해 본다.


그림도 글과 마찬가지로 나와 마주하는 매개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의 세계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누군가의 마음이 움직일 수도 있다.

똥 손이라도 로망이 있다면 지칠 때 잠시라도 순수한 재미를 주는 예술적 취미를 가졌으면 좋겠다.


아뜰리에에 2번 가서 완성한 첫 작품에 사인을 하며 마무리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림 같은 아뜰리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