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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세상은 내편 Sep 22. 2020

가을이 왔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여름

나를 깨우는 순간


얼마 전 야근 후 지하철에서 내려 고단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와 조금만 걸으면 산책로를 통해 집으로 걸어갈 수 있다.

이미 늦은 밤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다.


그 길을 걷는 동안 사라락 스치는 바람이 남달라 마스크를 내렸다.

가슴 주변이 간질간질하고 이유 모를 설렘에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뺨을 어루만지며 첫 번째 공기가 계절이 바뀌고 있다고 속삭이듯 지나가고 다음 공기가 익숙한 듯 낯선 향기를 들이밀었다.


고개를 양쪽으로 돌려가며 주변을 살펴봤다.

어두웠지만 노란빛이 돌고 있는 나뭇잎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랬구나.

가을이 오고 있었구나.


걷는 동안 공기가 나를 안아서 집에 데려다주는 것처럼 황홀한 기분으로 집에 도착했다.






한동안 야근과 주말출근이 이어지며 회사 업무에 집중해야 했고, 기본적인 육아와 가사도 잘 챙기기 힘들 만큼 체력과 절대적인 시간이 모자랐다.


어느 정도 자리 잡았던 일상 루틴은 코로나를 핑계로 내 의지와 함께 무너진 지 꽤 된 데다 회사 프로젝트 막바지 작업을 하며 루틴이라 부를 만한 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끈을 잡고 있는 것은 나깨순(나를 깨우는 순간) 글쓰기 진행이 큰 위안이 되고 있다.

처음엔 인스타 이웃이 코로나로 자신이 정말 괜찮은지 모르겠다는 글에 오지라퍼가 되어 같이 나를 깨우는 글쓰기 해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했다.

누가 보면 내가 먼저 손 내밀어 누군가에게 나눈 것 같지만 실은 내가 이 모임을 진행하며 즐거움과 감동을 얻고 있다.

그냥 스치듯 보면 알 수 없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알아가고 다양하지만 삶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4명이 함께 바쁜 일상 가운데 짬을 내어 각자의 시간에 3주째 글쓰기를 하고 있다.

3주 차 첫 번째 질문은 현재 좋아하는 행동, 물건, 취미 등 20개를 적어 보기다.



나는 올해 나깨순을 3번 진행하며 몇 번 적었던 내용이라 지난 회차에 적었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좋아하는 것들 중 내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뭘까 생각해보니 글쓰기였다.

정확히는 내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기지 못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기록하는 시간이 너무너무 그리웠다.



그래서 나는 회사 점심시간에 밥과 수다 대신 카페로 향해서 이렇게 글을 쓰러 왔다.

눈물 나게 반갑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지난주까지는 코로나 2.5단계로 회사 앞 카페에서 취식이 불가능했는데, 이번 주 풀리면서 점심시간 고요히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감사하게 느껴진다.


짧은 시간이라 금방 지나가고 글 한 편도 완성하지 못했지만 황홀한 기분에 젖어 1시간 남짓 보냈다.






다음 날.


글 몇 줄을 쓰고 힘을 얻어 나는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 낯설어진 새벽 루틴을 실행했다.

명상하고 스트레칭을 하고 산길에 난 산책로를 15분 걸으면 나오는 나의 작업실  아티스트 웨이로 향했다.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다가 작업실 동지가 가져다 둔 헤르만 헤세의 가을을 집어 들었다.

출근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독서에 쓸 수 있는 시간은 10분 정도였다.


창의 커튼을 더 열어젖히고 점점 노랗게 변하는 나무를 보며 책을 펼쳐 나오는 페이지를 읽었다.





가을의 시작


가을이 하얀 안개를 흩뿌린다.

늘 여름일 수만은 없는 것!

밤은 램프의 불빛으로

나를 유혹하면서

추위를 피해 일찍 귀가하도록 한다.


머지않아 나무도 헐벗고 정원도 텅 비겠지.

그때가 되면 야생의 포도송이만이 여전히

집 주위에서 작렬하다가, 머지않아

그 빛도 역시 바래겠지.

늘 여름일 수는 없으니!


유년 시절에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그 옛날의 즐거웠던 빛을 더 이상

간직하지 못하고,

나를 더 이상 즐겁게 해 주지도 못한다.

늘 여름일 수는 없으니!


아, 사랑이여, 경이롭던 열정이여,

수년간 쾌락과 노력으로

내 피 속에 늘 타올랐던 것이여,

오, 사랑이여, 그대 역시 꺼져가려는가?






나는 가을바람에 설렜는데

헤세는 인생의 가을로 접어들어가는 여름을 아쉬워하는 듯하다.


나는 내가 아직 인생의 여름이라고 생각하나 보다.

인생의 가을이 오면 나 역시 헤세처럼 다시 올 수 없는 이 시기를 그리워할지 모른다.


비록 코로나가 많은 일상을 바꿔 놓았다 해도 내 여름을 도둑맞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기록도 멈춰서는 안 된다.



2020년의 봄과 여름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남은 2020년의 3개월을 코로나도 막을 수 없게 열정적으로 살지 않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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