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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 세상은 내편 Nov 23. 2021

소설이 나의 삶과 맞닿아 있을 때 위로를 받는다

소설 '밝은 밤'을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던 밝은 밤에

읽고 난 후 여운을 심장 가득 안고 있는 시간을 좋아하면서도 소설은 나에게 실용서나 에세이에 우선순위가 밀리는 장르다.

읽기 시작하면 맥락을 끊을 수 없어 손에 들면 한 번에 끝까지 다 읽고 싶어지는 게 소설책이니까 넷플릭스에서 16부작 완결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면 그날 밤샐 거 아니까 부담을 가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서평단, 독서 모임 지정도서, 선물 덕분에 소설을 간간이 읽게 될 때는 부담을 내려놓고 소설의 즐거움에 빠진다.


자기 계발서가 빠르게 동기 부여하고 실행을 촉구한다면

에세이는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낯섦을 동경하고 깨닫기도 하며

낯익음에는 공감하거나 안도하게  한다.


소설은 주위에 있을 법도 없을 법도 한 이야기를

한 명 한 명의 캐릭터가 책 위에 살아 움직이면서

섬세하게 나의 삶과 맞닿아 있는 부분을 건드린다.


물론 책에 따라 장르와 상관없을 수도 있고, 책과의 짧은 경험을 가진 내 기준으로 정리한 것이니 일반화할 수 없다.


직전 회사에서 첫 슬럼프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유튜브에서 '퇴사', '번아웃'에 관한 영상을 찾아서 보곤 했다.

한 번 검색어를 입력한 이후 알고리즘에 의해 매번 번아웃에 대한 추천 영상들이 떴다.  

동영상 자체보다 회사 생활에 지친 나와 같은 사람들이 달아놓은 수백 개의 댓글에서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에 공감받고 안심도 됐던 것 같다.


하지만 답을 줄 수 없는 콘텐츠와 부정적인 말들로 도배될 수밖에 없는 댓글은 금방 지겨워졌다.

에너지가 떨어져서 자기 계발서가 부담스러워지던 어느 날, 읽을 책을 고르다 알랭 드 보통의 책과 동명인 장류진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이 눈에 들어왔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들의 연령은 나보다 낮은데 내게 익숙한 장소 판교를 배경으로 한 단편은 소설 속 장소가 그려지고 IT 업계에 일하는 주인공에게 내적 친밀감까지 느끼게 했다.

윗사람의 갑질,

사내 동기 커플로 결혼하면서 서로 연봉을 공개하다 차액이 크다는 걸 안 것,

이력서를 내고 떨어지고를 반복하다가 정규직으로 출근하는 날,

제대로 시작도 못해 본 꿈 때문에 스스로 초라해지는 경험 등 각 에피소드들 속 인물들을 통해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나를 볼 수 있었다.

많은 부분들이 나와 내 동료들의 삶과도 맞닿아 있었다.


소설은 경쾌했고

주인공들은 일의 좋은 면을 보거나 떠나거나 한 발 나아갔다.

어떤 방향으로 가든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뀐 주인공들을 보며 나는 위로를 받았다.


자기 계발서도 에세이도 시도 아닌 소설에서 위안을 받은 것이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 은 창고 살롱의 지정 도서로 읽게 되었다.


모임에서 읽지 않았더라도 내 손에 들어오게 될 책이었다.

작업실 동지도 '밝은 밤'을 울면서 읽었다며 주변에 추천을 하고 있는 책이라고 했다.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길래 '펑펑 울었다', '눈물을 흘렸다', '눈물을 참으며 읽었다'라는 리뷰가 넘치는 걸까?


의무감으로 읽기 시작한 380 페이지의 두꺼운 분량의 소설은 몇 페이지를 넘긴 다음부터는 읽는 도중에도 다음 페이지를 궁금해하며 이야기 속으로 금방 빨려 들어 가게 만들었다.


여성의 서사를 다루고 있지만 페미니즘 소설은 아니다.

대물림된 안전하지 않은 삶과 그 안에서 서로의 안전한 버팀목이 된 여성들의 연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연은 남편의 외도로 이혼을 하고 새 직장을 얻어 이주한 희령에서 엄마와 의절한 할머니(엄마의 엄마)와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서 20년 만에 어색한 재회를 한다. 지연 역시 자신의 편에 서주지 않는 엄마와 사이가 좋지 않다.

손녀에게 어떤 질척거림(?)도 없는 할머니의 집을 오가며 자신과 너무나 닮은 증조모(할머니의 엄마)의 사진을 보게 된다.  그리고 할머니로부터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주인공 지연까지 4대에 걸친 가족사와 여자들의 서사를 듣게 된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도 모를 벗어나기 힘들었던 '포기, 체념'이라는 굴레는 대물림되며 그녀들에게 결혼이라는 관계에서 스스로를 속이는 선택을 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런 삶에서도 자신을 그대로의 모습을 알아 봐주고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고 가족보다 안전한 관계 속에서 잠시라도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할머니를 통해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상처를 치유하고 숨겨놨던 어린 자신과 마주할 용기를 낸다.


밝은 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았다. 엄마에게 들었던 엄마 집안의 서사와 엄마가 일부만 알고 있는 할머니(엄마의 시모)의 이야기도 소설 속 그녀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많이 배운 신여성이든 가난하고 문맹인 여성이든 남자가 꾸린 가정 아래서 보호받지 못하면 살기 힘든 세상이었다. 같이 일을 하며 가정 살림에 보태도 인정 못 받고 남자가 중혼이라도 여자가 감내해야 했다. 그 울타리 조차 출신, 아들을 낳았는지에 따라 가정 안에서도 멸시를 겪어야 했다. 남존여비라더니 그 시절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엄마 고향 동네 이웃 이야기까지 듣다 보면 더 가관인데, 어떻게 그리 살았을까 물으면 엄마는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라고 하셨다.


세상이 바뀌고 사회 구조와 인식이 많이 바뀐 지금도 여성이 부당함을 느끼는 건 가정 안에서 더 많은 것 같다. 지인은 명절에 시가에서는 남자, 여자 상을 따로 차리고 여자 상위에 없는 고기반찬이 남자 상위에 있었다고 했다. 그게 부당하다고 아무도 인식을 못하고 있는데, 참다못한 며느리가 어느 날 남편에게 '나도 내가 구운 생선전 먹고 싶어.'라고 했을 때 그제야 남편도 두 상차림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편의를 제공받은 쪽은 인식 못하고 불익을 당한 사람만 인식하는 불편함이 존재한다. 원래 그런 거니까 문제 일으키지 말고 포기하라는 다수의 압력이 많아지면 적응이 되지 않아도 모른 체하고 입을 다물게 된다.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사회에서는 그 시대에 맞게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모습을 요구하고 가족 내에서도 종교나 가풍 등 신념을 주입한다. 전쟁의 역사, 남성들이 주도하는 사회였고 여성들에게 권위를 빼앗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처나 자식 앞에서 본인이 잘못을 해도 인정하지 않고 위신을 세우지만 자신을 속이지는 못했을 테니 그들도 괴로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소설 속 등장하는 증조부, 조부, 아버지, 지연의 남편은 하나같이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정당화시키려는 인물들인데 증조부의 친구 새비 아저씨는 달랐다. 남녀노소,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대했다. 집안에서 정당하지 않은 대우를 받는 새비 아주머니(부인)를,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 했다. 힘든 시절이었고 전체적인 삶을 봤을 때 소설 속 남자도 여자도 행복한 사람이 없는데 새비 아저씨, 아줌마, 그 딸 희자의 가족은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을 것 같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서로를 위하고 보듬었으니까.



증조할머니(정선, 삼천 아주머니라 불렸다), 할머니(영옥), 엄마(미선), 지연까지 대물림되며 신념처럼 그녀들을 속박하고 괴롭힌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증조모는 고개도 마음대로 들고 다닐 수 없는 백정의 딸로 태어났지만 타고난 기질이 호기심이 많아 고개를 숙이고 세상을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포기하고 체념하는 법을 가르쳤지만 멸시와 폭력, 따돌림 속에서도 삶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일본군에게 끌려갈지 모르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희생하겠다는 증조부의 마음은 충동적이었고 곧 자신을 그렇게 만든 건 아내 탓이라고 비겁한 생각을 했다. 증조부를 따라 도망간 개성에서도 그녀의 신분이 알려지자 따돌림을 당해 외로웠고 남편조차 그녀를 무시하는 걸 알았을 때 체념해 버리고 말았다.


할머니는 증조부가 남선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였다. 증조부는 일평생 할머니에게 만족하지 않았다.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인정이라도 받아내고 싶어서 평생 증조부의 눈치를 살폈다. 남선을 남편으로 맞아들인다면, 할머니는 남선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증조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할머니는 그때 자신이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증조모는 남선은 아버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고 할머니에게 결혼을 만류했지만 그때는 그게 안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미선)까지 낳았지만 할아버지는 이미 처자식이 있었다. 증조부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함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밝혀지고 나서도 여자가 남자 하나 잡지 못한다고 나무랐다. 미선이 딸이었기 때문에 할머니에게 키우게 하고 미안한 기색도 없이 본처에게 돌아갔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할머니는 딸도 아버지 없이 키우게 된다.


아버지 없이 자랐다는 것이 핸디캡이 된 엄마도 남자를 선택할 때 자신을 속인다.

엄마가 결혼할 남자를 데려왔을 때 너를 존중해줄 남자와 가족을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는 할머니의 말에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나는 이게 꿈이에요. 남들은 그냥 하는 일도 나에게는 힘든 일이에요."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 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엄마도 그런 결혼을 하고서 대등하지 않은 관계와 상대에 대한 실망으로 기대를 버리고 살아왔고 지연의 결혼도 사랑하는 관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가장 안전해야 하는 가족의 관계가 이들에게는 기대와 실망, 체념으로 이어지는 경험의 역사였다.

그래서 매번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속이고 맺은 관계는 오히려 대를 이으며 상처를 냈다.


증조모도 할머니도 딸이 결혼할 때 '너를 위해 주는 사람을 만나라'라고 말했지만 어딘가 운명이 쓰여 있기라도 한 듯 반대로 한다. 그 남자들이 결혼에서 기대한 건 뭐였을까?



애증의 관계, 엄마와 딸


지영과 엄마 미선이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나와 엄마의 대화와 닮은 데가 있다.

위한다고 하는 말이 어딘가 거슬리고 결국 말이 오가다 보면 서로의 약점을 찔러 상처를 내기도 한다.


지금 60~70대는 완벽한 가부장제 속에 자랐고 엄마라는 이름 외에 자신의 삶이 거의 없었지만 자신의 딸은 공부시키고 사회 진출도 시켰다. 자신보다 좋은 환경에서 성장한 딸에 대한 기대와 대리만족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사고가 남아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엄마는 그렇게 못 살았으면서 나한테는 왜 강요해?' 또는 '엄마가 그렇게 살았다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해?' 튀어나올 때가 있다. 너는 그렇게 살지 마라 하면서도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거라는 말이 도무지 맞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몇 년 전 K-장녀인 나와 엄마 사이에 곪아 있던 상처가 터져버렸는데, 그때 터놓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상처를 내는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삶이 대물림되는 거라면

나는 나답게 잘 살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내 딸이 나와 다르게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엄마를 보고 자신답게 살고 싶어 지도록 내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더욱더 단단히 한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가족보다 더 힘이 되는 관계가 있다.


증조모는 사람들과 남편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새비 아주머니의 호의도 자신의 신분을 알면 차갑게 변할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새비네는 처음으로 끝까지 변하지 않는 어깨가 되어준 사람이었다.

할머니도 증조모와 새비 아주머니네 가족과 있을 때만 안전함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들의 연대는 우정 이상이었다.

전우애와 견줄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힘든 순간마다 가족보다 서로 더 가까이 있어 주었던 증조할머니와 새비 아주머니의 관계는 이 서사에서 가장 눈물 나는 순간을 만든다.

서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책을 읽어주고 재봉틀을 가르쳐주며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고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던 할머니와 명숙 할머니의 관계는 함께 하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마음의 깊이를 보여준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지만 삶의 모습이 달라져 섞일 수 없어 안타까웠던 할머니와 희자는 세월을 뛰어넘어 세상에 둘만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것이다.

우연히 재회해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은 할머니와 지연이 있다.



나에게 어깨를 내어 준 사람은 누구인가?

삶의 매 순간마다 나에게 어깨를 내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상황에 따라 관계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질 때도 있지만 친구, 동료, 가족, 커뮤니티, SNS를 통한 인연들이 건네준 지지와 따뜻한 위로는 잊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있다.

새비 아주머니 같은 품을 내어준 사람도 있었나 생각해 봤다.

내가 미래가 두렵고 막막하던 시절 재촉하지 않고 식구들을 산에 데리고 올라가서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던 아빠, 내려와서 사주시는 밥을 먹으면서 기운이 났다. 내 동생이 공무원 시험에 떨어져서 낙담했을 때도 아빠는 똑같이 하셨다. 쓰담 쓰담해주는 아빠만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아빠의 마른 어깨가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주는 품을 가지고 있어서 감사하다.  


나는 누구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우선은 딸에게 언제든 편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충분히 기대고 또 그 어깨를 다른 사람에게 내줄 수 있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이를 낳기 전 나는 다른 사람의 힘듦을 잘 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나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공감능력이 자랐던 것 같다. 회사에서 동료나 후배들에게 '힘들지?' , '수고했어'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싶었고 엄마로 살면서 자신을 찾고 싶어 하는 동지들 뒤에서 응원했다.

앞으로 내가 만나는 많은 인연에게도 조건 없는 지지를 건네고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들이 또 누군가에게 기댈 어깨를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옛날에 호주에서 무작정 시드니에서 브리즈번으로 도시를 이동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티로 들어와 임시로 있을 숙소를 찾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한국인 학생이 다가왔다.  숙소를 찾고 있냐는 그의 말에 반가움과 경계심으로 반응했던 것 같다. 짐 하나를 들어주며 자신을 설명했다. 자신이 일본에 있을 때 길을 헤매는데 누군가가 대가 없이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고 나중에 자기에게도 그런 기회가 오면 꼭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이 그날이라 했다. 그는 깔끔한 숙소 앞까지 안내한 후 잘 지내라는 인사를 하고 바로 돌아서 갔다. 그때 생각했던 것 같다. 나와 너 사이의 give and take 가 아니라 자연이 순환하는 것처럼 도움을 주고받는 것도 순환하는 거라고.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 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


처음으로 e북을 구입해서 패드로 읽었는데 종이 냄새가 나는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엄마에게 선물하려고 한다.




#밝은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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