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밝은 밤'을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읽던 밝은 밤에
할머니는 증조부가 남선을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에 그를 받아들였다. 증조부는 일평생 할머니에게 만족하지 않았다. 아들이 아니었으니까. 아주 작은 부스러기 같은 인정이라도 받아내고 싶어서 평생 증조부의 눈치를 살폈다. 남선을 남편으로 맞아들인다면, 할머니는 남선을 통해 간접적으로라도 증조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할머니는 그때 자신이 스스로를 속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는 그와의 결혼으로 내가 지닌 문제와 내가 가진 가능성으로부터 동시에 도망치고자 했다. 나의 원가족으로부터, 해결하기 어려워 보이는 상처로부터, 상처 받을 가능성으로부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사람을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가슴이 찢기는 고통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감정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차단된 채로 미지근한 관계 속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나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이 있었을까.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종종 눈을 감고 어린 언니와 나를 만난다. 그 애들의 손을 잡아보기도 하고 해가 지는 놀이터 벤치에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학교에 갈 채비를 하던 열 살의 나에게도. 철봉에 매달려 울음을 참던 중학생의 나에게도. 내 몸을 해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던 스무 살의 나에게도. 나를 함부로 대하는 배우자를 용인했던 나와 그런 나를 용서할 수 없어 스스로를 공격하기 바빴던 나에게도 다가가서 귀를 기울인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