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두터움과 엷음

세사기일국(世事棋一局)

흔히 바둑을 인생과 닮았다고 비유한다. 세상사가 바둑 한 판과 같다는 ‘세사기일국(世事棋一局)’이란 말이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나는 오랫동안 바둑을 과대평가 하는 걸 경계했다. 바둑이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과대포장 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바둑뿐만 아니라 골프에도 삶이 녹아 있고 야구에도, 축구라 해도 그 안에 세상살이가 없을 리 없다.

바둑과 관련된 글은 그야말로 일을 할 때만 써왔다. 바둑을 주제로 글을 쓰면 왠지 모르게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바둑을 배제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을 스스로 심었고, 그러다보면 늘 마땅한 ‘쓸 거리’가 없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써야 한다며 채찍질 할 때가 많았고, 그러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했다.


요즘 생각이 조금 바뀌고 있었다. 바둑이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까지 해온 게 바둑이니까, 바둑의 언어로 바둑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 느낌을 얘기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지점까지 와 있었다.


『떨림과 울림』은 그렇게 내게 울림을 줬다. 이 책의 부제는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 그리고 우리’다. 물리학자 김상욱이 바라본 우주와 세계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수포자’ 중 한 사람이었던 나는, 사실 이런 류의 책은 잘 읽지 않는다.


 ‘트레바리 정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혼자였다면 절대 읽지 않았을 책을 함께 읽는 것’을 떠올리며 꾹꾹 참지 않았더라면, 아니 연휴 기간이 조금만 더 짧아서 심심할 틈이 없었더라면 아마 이 책을 읽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물리학자의 떨림은 바둑을 전공한 내겐 색다른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고민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머리가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리학을 한 사람이 물리학의 관점으로 세상을 얘기하듯 나는 바둑의 관점으로 세상을 얘기할 수 있는 거였고, 그래도 괜찮은 거였다. 이런 별 거 아닌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떨림과 울림이 책 제목이었는데, 다 읽어 보니 가장 앞 몇 페이지 외에 ‘떨림’과 ‘울림’을 인문학적으로 얘기한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게 솔직한 소감이다. 수포자이자 ‘물알못’인 나로선 이 책을 관통하는 물리적 관점과 주제로 독후감을 쓰는 데 어려움이 많다. 해서, 이번엔 바둑 얘기를 잠깐 해보려 한다.


바둑은 집을 많이 차지하는 쪽이 이기는 게임이다. 이 멘트는 아래 인용할 이번 책에도 등장한다. 하지만 재밌는 딜레마가 있다. 집을 차지하기 위해선 실리적인 수를 계속 선택해야 할 것 같지만, 실리에 집착하면 필연적으로 엷어진다. 엷은 건 약하다는 뜻이고 상대에게 공격을 당할 여지를 준다는 의미다.


반면 두터우면 걱정이 없다. 하지만 두터울 땐 필연적으로 손에 쥔 실리가 없기 마련이다. 상대에게 공격을 당한다면 오히려 맞서 싸우며 두터움을 발휘해볼 텐데,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쓸모없는 두터움만 손에 쥔 채 계가(바둑에서 모든 착수를 마친 후 집을 세는 것)할 때 집이 모자라 통탄의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세상살이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물질적인 것, 눈에 보이는 것, 한 단어로 요약해 ‘돈’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로 여겨지지만, 이것을 너무 탐하면 반드시 엷어지게 돼 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갈 수도 있고 삶 자체에 여유가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이걸 너무 등한시 한다면 ‘사람 좋다’는 얘긴 들을 수 있을지 몰라도 미래를 계획하기 어렵다. 요즘 같이 힘든 시기엔 잘못 하다간 길거리에 나 앉을 걱정까지 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서 ‘바둑은 조화’다. 100세를 일기로 타계하기 전까지 ‘살아있는 기성(棋聖)’으로 추앙 받던 우칭위엔 선생이 하나 남긴 바둑과 관련된 경구가 바로 이것이었다.


예컨대 3선(실리선이라 불리며 집에 민감한 느낌)에 돌이 많이 배치돼 있다면 다음 수는 4선(세력선이라 불리며 두터움을 지향한다)에 착점해 ‘고저장단’을 맞추는 게 바로 ‘조화’다. 실리와 세력의 균형을 어느 한 쪽으로 무너뜨리지 않고 조화롭게 하는 게 중요하다.


바둑 얘긴 이쯤 하고, 책에 나온 부분 중 알파고를 언급한 대목엔 다소 시정해야 할 내용들이 있다. 알파고-이세돌 매치가 열리기 전 기자회견부터 다섯 번의 매치가 끝나는 모든 순간을 현장에서 지켜보고 사진을 찍고 글을 썼던 입장에서, 이 ‘세기의 대결’엔 여전히 잘못 알려져 있는 점들이 많다.


“알파고의 목적은 바둑에서 이기는 거다. 바둑은 집이 많은 쪽이 이긴다. 수학적으로 말해서, 나와 상대가 가진 집 차이를 최대로 만드는 경향으로 움직이는 기계다. 이를 위해 알파고는 모든 가능한 미래를 미리 가보며 집의 차이를 계산한다. 그 차이가 최대가 되는 경로가 나오도록 연결망의 결합 세기를 조정하는 것이다.” (66~67쪽)


현장에 내내 있었고 바둑프로기사를 목표로 했던 연구생 출신 바둑기자라는 점 덕분에 알파고와 이세돌 매치 1~5국 다섯 번의 대국을 전격 해부하는 책을 공저할 기회를 얻었다. 내가 맡은 건 5국이었는데, 앞선 1~4국과 달리 마지막 5국에선 유일하게 ‘계가’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알파고의 끝내기 실력까지 볼 수 있었던 셈인데, 이 지점에서 책에 나온 위 인용문은 ‘틀린’ 글이 된다.


첫 째, 알파고는 수학적으로 말해서, 나와 상대가 가진 집 차이를 최대로 만들려는 경향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적은 차이라 할지라도 가장 확실하게 이기는 길을 선택한다. 즉 상대보다 단 ‘반집(바둑에서 무승부를 방지하기 위해 도입한 가상의 집 개념)’이라도 앞설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그 길을 택한다는 얘기다. 설령 그 길이 몇 집 가량 손해를 보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확실하게 이길 수만 있다면 알파고는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


둘 째, 알파고는 모든 가능한 미래를 미리 가보지 않는다.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바둑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이미 많은 매체에서 다뤄졌듯 ‘10의 170승(乘)’이다. 현재로선 슈퍼컴퓨터로도 연산이 불가능하다는 게 구글 딥마인드 측 알파고 담당 개발자의 인터뷰 내용이었다. 따라서 딥마인드에선 신경망을 두 개로 나눠, ‘정책망’과 ‘가치망’이 모든 수를 다 계산하지 않고도 최선에 가까운 수를 찾도록 만들었고 알파고의 대단한 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물론 68쪽에 부연되는 설명은 적확했다. 알파고는 이길 의도를 갖고 바둑을 둔 건 아니었으므로. 그래서 놓이고 보면 당연한 수임에도 ‘인간은 절대 둘 수 없는 수’, ‘인간이라면 떠올릴 수 없는 감각’이란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저자는 91쪽에서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쓰고 있는데, 사실 이건 좀 가혹한 얘기다. 나도 한 때 어떤 분야에 대해선 이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지만, 앞서 저자가 알파고에 대해 알 수 없음에도 말한 걸 보면 이건 역시 말하는 본인도 지킬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신경망회로도 인간의 뇌 못지않은 직관을 가진다는 것을 ‘알파고-이세돌’ 시합은 보여주었다.”(152쪽)


사실 바로 이 부분, 직관에 대한 내용이 알파고-이세돌 매치의 꽃이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창의성’에 대한 환상이 산산조각 나버렸고, 오히려 이 점은 현재 바둑기술의 대대적인 진보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이에 관해선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독후감으로선 이 정도 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너무 바둑 얘기로 깊이 나아가면 엷어질 수 있으니 조화롭게 마무리 하고, 창의성과 직관 그리고 인공지능이 뒤엉킨 스토리는 다른 곳에서 쓰는 게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흡인력 넘치는 문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