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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은 모든 걸 전복시킨다

feat. 무교 교주

나는 무신론자다. 모태신앙이었던 탓에 초등학생 시절 내내 '복사'를 했었고, (하지도 않을) 결혼식은 꼭 성당에서 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음에도 지금 나는 무교다. 성인이 된 후 나는 '신'이라는 건 나약한 인간이 만들어낸 환상이거나 권력과 자본을 틀어쥔 상위 계급들이 피지배층을 보다 손쉽게 복종시키기 위해 만든 비열한 거짓말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결론내렸다.


대학 시절부터 생긴 악취미가 있다. 시간이 남아 돌아 심심할 때 누군가 포교를 하려 하면, 반대로 그 당사자를 논리로 굴복시커나 혹은 나의 무교를 전도해버리는 것이다. 나름대로 성경 깨나 공부했던 내공도 있어 성경 구절로 뭔가 반박하려 들면 같이 성경을 인용해 맞선 것도 꽤 효과가 있었다. 이렇게 잠시 놀아주다 보면 상대쪽에서 먼저 'GG '를 선언하곤 했다.


무교도 하나의 종교 계파로 인정 받을 수 있다면, 나는 나만의 완벽한 논리로 구축한 '수제 무교(?)'의 창시자이자 교주라고 할 수 있다. 즉 내 사전에 '사후세계'란 단어는 있을 수가 없었고 있어서도 안 됐다.


올해 4월의 어느 날. 그날 이후로 나는 사후세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사람이 됐다. 사후세계 같은 게 절대 있을 리가 없다고 확신하지만 한 편으론 꼭 있기를 바라는 모순을 강제로 떠안고 살게 된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이다. 죽음이 찾아온 순간을 경험 못해본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전혀 일상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았다. 황망히 떠난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뭐였는지 떠올려보자 슬픔에 앞서 화가 났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가족 그것도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으로 이 세상에서 만난 사람이 서로 마지막에 나눈 대화가 고작 그런 얘기들이라니. '불효자는 웁니다' 같은 연극을 보면 부모님은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계실 때 잘하라는 말이 꼭 등장하지만, 그래도 이건 빨라도 너무 빨랐다. 못했던 말이 너무나 많은데 갑자기 영원한 이별이라니. 무교 교주가 사후세계를 꿈꾸는 모순은 이렇게 탄생했다.


상실은 모든 것을 전복시킨다. 상실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삶이 흔들리고 변하는 강도 또한 커진다. 뒤로 걸어다니든 뜬금포로 침팬지를 입양하든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상실 혹은 부재를 전제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완벽한 주인공이 어떤 허점도 빈틈도 없이 살아가는 삶 같은 걸 소설로 쓴다고 생각해보면 쉽다. 그런 얘기로는 원고지 10매도 쓰기 힘들 뿐더러 그걸 읽어줄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각각의 소설들마다 결이 달라지는 부분이 바로 상실을 견디는 방법이다. 좌절하며 침잠하는 주인공도 있을 것이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당당하게 맞서는 주인공도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을 만들어내는 게 바로 '소설가의 일'인데, 얀 마텔의 상상력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발현됐다.


처음엔, 공감하지 않으려 했다. 아내와 아들이 갑자기 죽음과 조우한 것도 견디기 어려운데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까지 끌어들이다니. 안 읽혀, 공감되지 않아, 라고 되뇌이며 매번 책장을 덮는 바람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공감하고 싶지 않았고 읽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상실을 극복할 방법 따윈 없다.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듯이. 상실은 그저 견딜 뿐이다. 견뎌내다 보면 단단해지는 날이 올까. '견디는 삶'이란 왠지 무력하고 가엽다. 한 번뿐인 인생, 즐기라고 손짓하는 세상에서 혼자만 '엄근진'하게, 혼자만 세상의 온갖 풍파를 다 만난 것처럼 궁상을 떨고 있는 것도 꼴불견처럼 느껴진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케케묵은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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